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다.
입사 후 1년이 조금 안 됐던 것 같다.
회사가 규모가 커져 사무실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고 직원도 더 뽑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겨 밤새는 일도 조금 줄었고 (물론 야근은 여전히 많았지만)
밤을 새더라도 회사의 보안이 조금 더 좋아져서 회사에서 자더라도 크게 무섭지 않았다.
무엇보다 회사 복지도 더 좋아지고 직원이 더 생겨서 너무 좋았다.
우리 회사엔 정말 대단한 분이 계셨다.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하고,
주말에도 어김없이 나보다 먼저 나와 일하시던 대리님.(물론 그때 당시의 직함이다)
대표님이 회사를 차릴 때 가장 먼저 스카우트해서 데려오셨다는 능력자.
일도 잘하면서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내가 뭘 물어보면 묵묵히 챙겨주시고 모르는 건 직접 찾아서도 알려주시던 진짜 좋은 선배였다.
그분 덕분에 회사 생활이 더 편했던 것 같다.
회사가 커지고 직원이 더 뽑히면서 회사에 여러 사건들도 많았다.
참 독특한 직원도 있어서 대표님 속이 썩기도 하고,
정말 능력 좋은 직원이 들어왔다가도 업무강도를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기도 하고,
1-2년 사이에 직원들이 여럿 바뀌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를 묵묵히 지켰던 건,
나와 그 슈퍼맨 같은 선배와 새로 들어온 내 옆자리 언니였다.
나는 혼자 담당하는 언어가 달랐지만 내 양쪽으로 그분들이 자리하고 앉아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회사 생활을 덜 힘들게 할 수 있었다.
내 언어를 담당하는 직원이 들어오기도 했었지만..
다들 업무 강도를 버티지 못했다.
그들이 엄청 반갑고 새로 들어온다는 데에 무척이나 설렜었는데 나가는 그들을 말릴 순 없었다.
운 좋게도 내 가까운 주변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학교 밖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거래처 담당자나 일부 클라이언트는 좋기만 할 수는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사람들도 있었다.
내게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를 남긴 클라이언트도 있다.
아직 미숙한 어린 담당자를
마치 야생에서 마주한 쉬운 사냥감쯤으로 보고
마주할 때마다 잡아먹으려 하던..
퇴사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도 그 업체가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왠지 모르게 간담이 서늘하다.
그 와중에 내 자신감을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나를 매번 잡아먹으려 안달이던 그 악명 높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날이었다.
차기 계약이 걸린 중요한 자리였다.
나는 이미 긴장 상태였고 청심환도 먹었다.
가는 길에 대표님은 나를 안심시켰다.
별일 아니다. 그냥 가서 형식적인 인사하는 자리다.
맨날 하던 거 조금 보여주면 된다.
나도 내가 그렇게까지 긴장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날 나는
난생처음 패닉 혹은 공황상태를 경험한 것 같다.
회의실 안, 작은 원탁테이블에
대표님과 나, 클라이언트와 그 회사의 다른 부서 직원 이렇게 4명이 앉아있었다.
내가 뭔가 보여줬어야 하는데 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 1년 넘게 맨날 해오던 것이었는데, 정말 단순한 작업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 겪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이해가 안 되지만..
주변의 소리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처럼 페이드아웃되었고 하얀 모니터 화면 속 검은 글씨들은 알아볼 수 없었으며 당연히 읽을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나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표님은 당황했고 다른 직원분은 내가 너무 긴장한 것 같다며 허허 웃었다.
그... 담당 클라이언트는... 뭐하고있냐며 날카로운 목소리와 말투로 나를 더욱더 닦달했다.
나는 결국 그 미팅룸에서 아무것도 못한 것 같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뭘 하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다행히도 회사의 계약엔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 했던 건 정말 그저 퍼포먼스 그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내 자존감과 자신감은 바닥을 뚫고 지하 가장 깊은 세계까지 떨어졌다.
회사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내가 뭘 한 거지. 자책감이 들었다.
퇴사해야 하나,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옆자리 언니가 들어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사양했지만 결국 나랑 그 언니, (그때 당시) 대리님,
이렇게 셋이 저녁을 먹었다.
대표님이 무조건 위로해 주라고 했다고.
내 잘못 아니다.
그 클라이언트가 애초에 했던 말과 다른 걸 시켰으니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
참 고맙게도 회사에서 그 누구도 나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만 안다.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그 클라이언트가 너무 무서웠다. 메일과 메신저 너머에서도 무서웠지만 실제로 보니 압박감은 더 심했다.
심리적으로 너무 긴장했고,
어찌 되었든 설명이 안 되는 행동을 했으며
(정확히는 해야 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 것)
나는 그게 스스로 무책임하고 멍청하다 생각했다.
그래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다들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주니까 그저 입을 닫았다.
왜냐하면
괜찮다고 한다면, 나는 아직 더 배우고 싶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그 사건으로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담당하던 언어는
고객사 담당자의 갑질과 여러 가지 단가문제로 작업을 줄이게 되면서 결국 해당 업체와 거래를 그만하게 되었다.
(아마 그 사건 이후에 나는 더 쉬운 사냥감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껏 살면서 그렇게 소리를 많이 지르고 화를 많이 내면서 모든 게 본인 위주인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 다음으로 그 업체를 맡게 된 회사는 오랜 경력직의 일 잘한다고 소문난 배테랑이 담당을 했는데도 그 클라이언트는 나에게 한 것보다 덜하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갑질은 더 심해졌으며 나중엔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아주 힘들어한다고 들었다)
내가 담당하던 언어는 아예 없어지고
나는 결국 영어 쪽으로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때 일했던 직원들과 종종 연락을 한다.
내 첫 직장생활에서
나를 가장 괴롭힌 건 업무 강도나 업무량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그래도 즐겁게 나름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내 옆을 지켜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내 옆에 누가 있는지였다.
내가 혼자 짊어지지 않게 도와주고
어쩔 땐 본인은 퇴근해도 되지만 괜히 같이 밤도 새 주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큰 자산이다.
어릴 땐 내가 그런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이제는 내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나 같진 않겠지만,
어딘가에 나 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때 내가 받았던 것처럼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네 잘못이 아니고 앞으로 더 잘할 거라고
그저 믿어주고 응원해 줘야지.
그럼 그 사람도 다른 이에게 그렇게 하고
그게 선순환이 되어 모두가 힘을 받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다워지고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