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와 남매 사이_1

남매의 유년시절 이야기

by AZ


어릴 때

연년생인 나와 동생은 죽이 곧잘 맞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둘이 가장 친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기억의 대부분이 동생과 함께였던 것을 보면.


특히 동생이 아기였을 때는

아기인 동생이 어찌나 예쁜지

나도 아기이면서 누나라고, 한 살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뽀뽀하고 물고 빨았더랬다.

포동포동하고 말랑말랑한 동생이 너무 예뻤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시장 쪽에서 살았는데 소리와 냄새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어린이집에서 언니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가는 방향에는 큰 목재소가 있었던 것을 냄새로 기억한다.


언니랑 동생이랑 셋이 집을 나와 시장을 지나*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언니는 나와 동생에게 인사를 하고 혼자 목재소를 지나 학교로 갔다.


*(시장을 지나는 길에 반찬가게가 있었는데

진열된 반찬 중에 검은색 콩자반이 항상 있었고

그걸 보면서 속으로 ‘정말 먹기 싫어!‘라고 생각하며 지나다녔던 기억이 있다)


언니가 혼자 학교를 가는 게 어찌나 멋져 보이고 부러웠던지.

나도 얼른 커서 저 길을 지나 언니랑 학교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나중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목재소를 지날 때마다 이만큼 큰 나 자신이 어찌나 대견하고 뿌듯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항상 진한 나무 냄새와 톱밥 냄새가 난다.

그게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동생이랑 연년생이다 보니

유년기 시절엔 동생 친구가 내 친구고 내 친구가 동생친구고 그랬던 것 같다.


항상 동생이랑 붙어 다녔는데

우리는 시장 근처에서 놀거나

엄마가 일하는 곳 근처에서 놀았다.


주로 팽이를 치거나 딱지치기를 하고

바닥에 줄을 긋고 땅따먹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많이 했다.


지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그런 놀이들인데,

정작 오징어게임이라는 놀이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팽이랑 딱지치기는 엄청 잘했던 기억이 있다.

신문지나 종이를 여러 겹 겹쳐서 최강의 딱지를 만들기도 하고

종이 재질에 따라 공격용과 수비용이 나뉘기도 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주말에 문 닫은 동사무소로 가서 계단에 쌓인 눈을 평평하게 눌러 짧은 눈썰매를 탔었는데

그게 그렇게 즐거웠다.


여름엔 내 친구 집에서

팥빙수를 만들어 먹곤 했는데,

지금은 레트로라고 불이는 디자인의 빙삭기로

통으로 크게 얼린 얼음을 열심히 갈아

거칠고 서걱서걱한 얼음에

팥이며 젤리며 떡을 취향껏 넣고 만들어 먹는 빙수는 한여름에 최고 간식이었다.


그때 그 친구와는 내가 9살 때 다른 동네로 이사 오면서 헤어졌는데,

이사 와서도 한동안 집전화로 전화도 하고

편지로 펜팔도 하며 연락하고 지냈다.

(핸드폰이 없어 집에 전화해 “누구 집에 있어요?”묻던 시절 이야기이다)


다른 이름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그 친구 이름 세 글자는 여전히 기억할 만큼

유년시절 가장 친하고 좋아했던 친구였다.

(지금은 어디 사는지 모르지만 잘 지내기를!)



유년시절 기억에 남는 큰 사건이 하나 있다.


그날도 동생이랑 놀다가 엄마가 일하는 곳에 갔던 것 같다.

엄마가 용돈을 주셔서 동생이랑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나왔었다.

엄마가 일하는 곳에서 가까운 슈퍼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동생과 내기를 했다.

누가 먼저 슈퍼에 도착하는지.

슈퍼 바로 앞은 차가 다니지만 차선은 없는 그런 동네 골목길이었고,

그 골목길은 내리막길 끝에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엄마가 일하는 곳에서 출발해

엄마가 일 끝나고 집 가는 길에 종종 들러 사주던 돈가스집을 지나

내리막길을 내달린 후에 슈퍼에 도착할 수 있는 동선이었다.


내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런데 나는 동생보다 한 살 많다.

유년시절 1년 차이는 체급에 꽤나 차이가 있다.

뻔히 내가 앞서는 내기였음에도 나는 뒤도 보지 않고 전력질주했다.

슈퍼엔 당연히 내가 먼저 도착했고

차오르는 숨을 헉헉 내쉬며 기뻐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분명 나보다 늦더라도 뒤에는 있어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당황했던 것 같다.

내 눈앞엔 큰 화물 트럭이 있었고 그 주위에 어른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몰려있었다.


처음엔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동생 이름을 불러 찾았다. 어디 있냐고 찾았던 것 같다.

어떤 어른이 저기 트럭 밑에 아이가 깔렸다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


나도 기껏해야 어린이집 다니는 어린아이였다.

어찌할지를 모르고 엉엉 울면서 엄마에게 갔다.

엄마가 왜 우냐고 물었다.


동생의 사고 소식을 전해야 했는데, 내가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일하는 곳 비상구 계단에 혼자 가서 웅크리고 벌벌 떨며 울었던 기억만 난다.


비상구 문 밖에서 큰소리가 났다.

아마 동네 사람이 동생을 알아보고 엄마에게 사고 소식을 전하러 와주신 것 같다.

엄마는 급히 뛰쳐나갔다고 한다.


나는 무서웠다.

내 탓은 아니지만 내 탓인 것 같았고, 어른들이 내 잘못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다행히 정차되어 있던 트럭이었고,

동생은 내리막길을 빠른 속도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그 트럭 밑으로 들어가 끼어버린 사고였다.


그래도 머리 쪽에 상처를 입은 동생은

얼마간 병원에 입원해 이런저런 검사를 많이 받았는데,

나는 동생 병원에 가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는

약간 과장하면 ‘네가 감히 거길 왜 가’ 같은 느낌으로 어른들이 핀잔을 줬다고 기억하는데

나중에 엄마에게 물으니 누가 그랬냐고 아니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동생 퇴원하는 날에서야 겨우 병원 입구에 발을 들였고,

저 멀리에서 높은 계단을 내려오는 동생은

어쩐지 위풍당당해보였고,

그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는 병원 입구 바로 옆에 있는 약제실 근처에서

그런 동생을, 약간 몸을 숨기고 바라봤던 것 같다.

(그때는 약국이 아니라 병원에서 약을 샀는데, 가족 중 누군가 약을 사고 있었고 난 그 어른을 꼭 붙잡고 숨어있었던 것 같다)


동생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아직도 그날의 이야기를 동생과 해 본 적이 없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때 나를 원망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남매지만 아직 어렸어서

자주 같이 씻었던 기억이 있다.


큰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동생이랑 들어가 같이 물장난을 하며 목욕을 했는데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내 남자친구라는 아이도 가끔 와서 셋이 또는 나랑 둘이 같이 씻었던 기억이 있다.


남자친구라고 하는 말이 재미있긴 하지만,

유치원 다니는 꼬마들도 그런 게 있다!


그 아이가 왜 우리 집에 와서

나와 동생이 목욕하는데 같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그 아이도 같이 씻겨줬다.


그 친구는 길 건너 동네에 살았고 영광교회를 다니는 친구라는 게 기억난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같이 목욕하고, 손잡고 걸어 다니고

나란히 그네를 타고 놀았던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크면 결혼하자는, 그맘때는 다 하는 그런 진부한 멘트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친구의 나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그 친구가 다녔던 교회 이름만 기억나는 어처구니없는 웃긴 상황이랄까.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네는

내 기억의 시작이 되는 동네이기도 하다.


그보다 더 어렸을 때의 기억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다.


그래서 한 번은 그 동네를 다시 가보고 싶은데

예전에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언뜻 지나면서 보니

너무 많이 바뀌어서 아쉬웠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을 따라 동네를 돌아다녀 보고 싶기는 하다.


그곳에서 어쩌면

아직 어린 나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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