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볼 수 없으니 아픈 기억도 추억이 된다
나는 결혼 후 25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버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편과 연애하던 중에도 남편에게 말했었다.
내가 만약 당신과 결혼 후 이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버님 때문일 거라고...
남편도 부정하지 않았었다.
좋아하지 않았지만, 늘 아버님의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님은 나를 의지하셨지만, 그건 자식처럼 아끼는 느낌과는 달랐다.
살면서 아버님께 서운한 일이 너무 많았고,
그 중 내 가슴에 못 박힌 채로 남은 세 가지 사건(?)을 생각하면...지금도 마음이 시리고 서럽다.
내가 며느리가 된 지 3년쯤 되던 해에 직장을 그만두셨고 그 이후부터 늘 우리 부부의 도움으로 생활하셨다.
월세 보증금 한푼 받은 것 없이, 정말 10원도 없이 시작했기에 맞벌이로 지금 이 상황까지 나는 너무나도 힘들었고, 친정부모님에 관한 것은 오빠에게 미룬 채 시댁과 우리집 두 가구의 생활비를 감당해야 했다.
다행히도 시부모님들은 검소하셨지만, 나는 육아휴직이 보장된 이 직장에서, 출산휴가만 끝내고 복직해야 했다. 친정에는 별 도움도 못 드리는데도 말이다.
암튼 그 이후로 경제적인 부분에 많은 도움을 받아서인지 아버님은 내 의견을 존중하시는 편이었다.
그래도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아버님의 본심은 나를 허탈하게 했고, 아버님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당신 딸들보다도 더 시간을 자주 보내고, 늘 용돈을 챙겨 드리고, 건강을 염려해도
아버님께 나는 그저 돈 벌어주는 며느리, 손주 낳아준 며느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미운 마음이 큰 시아버님이 돌아가신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
이 무거운 감정의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나이 50이 넘어서 본 직접적인 죽음의 목도 때문인지, 곁에 계시던 아버님에 대한 빈자리를 느껴서인지..
아님 이제 홀로 계신 어머님을 책임져야 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얼마전까지도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던 아버님이 한줌 재가 되는 것을 보았다.
아버님의 육체도 없어졌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 일이 없다.
아버님은 서운하지 않으실까... 그렇게 꼭 쥐고 놓지 않고 싶었던 이 생의 세계에서
본인이 사라졌는데도, 한줌 재가 되어 형상이 없는데도
세상이 너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
발인 후 시댁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머리카락이 몇 올이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까지 시댁에서는 본 적이 없다.
깔끔하신 아버님은 항상 머리카락이며, 욕실 물때며, 신발장 흙먼지를 그때그때 닦고 쓸고 하셨다.
머리카락 몇 올을 보며 아버님의 빈자리를 실감했다.
장례식을 끝내고 아버님 휴대폰을 정리하면서 카드 결제 내역이 있길래 보니
돌아가시기 전 날, 홈쇼핑 보면서 만두를 주문하신 거였다.
어머님과 공원 산책도 하셨다고 한다.
올해 대학 입학을 한 둘째 손주 용돈 보내줘야겠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항암 치료를 하시면서 당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장 내일일 줄은 모르시고, 산책을 하시고, 만두를 주문하셨다.
80년의 생을 이끌어 왔는데, 당장 내일인 줄 모르고, 생의 줄이 끊겨야 한다는 게 너무 허망했다.
인간이란 존재가 생과 사의 앞에서, 얼마나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코코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아버님이 그곳에서...당신을 이리 자주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다.
아버님이 조금은 후회도 하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못마땅하셨던 며느리가, 이리 많이 기억해 줄지 알았다면 좀더 따뜻하게 대할 걸....하고.
가장 춥고, 눈 많이 내리는 날 아버님 발인을 했다.
추운 곳에 아버님을 혼자 두고 온 것 같아 마음이 시렸는데, 얼마전 어버이날 가 뵈니 봄햇살이 따스했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