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보다 낯선 멘트를 들었다. 그건 바로 '헤더' 그 멋진 다이빙 슛을 캐스터는 헤더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분명 '헤딩'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 들을 수 없다. 대신 헤더라는 표현을 주로 쓴다. 둘 다 가능한 말이지만 내 입장에서 어쩐지 헤더는 소금 없는 프라이 같다. 말 맛이 싱겁다. 차라리 그냥 '슛, 골'이라고 외치는 게 좀 더 시원하다. 아마도 축구의 기원을 영국에 두고, 리그 문화 역시 EPL이 가장 강력하기 때문에 업데이트된 영어 표현을 차용한 것 같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라는 관용어도 있지만 사실 인류 역사가 곧 전쟁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의 머리와 두개골을 발로 차며 놀이 한 원시적 형태가 축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또 최근에는 영국이 아닌 고대 중국에서 축구의 기원을 찾고 있다. 축구의 규칙은 영국에서 시작했어도 그 유래는 훨씬 옛날 우리의 공격본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heading'이라는 표현 자체가 영어권에서 어색한 건 맞다. 머리로 뭔가를 하는 지속적 행위를 뜻하기 때문에 락 밴드에서 하는 헤드 뱅잉에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일본식 조어의 오류이기도 하다. 현지화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상 머리와 손이라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동명사화 한 것이다. 다른 예로, 센터링과 핸들링이 있다. 이 역시 어색한 일본식 표현(Japanglish)이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공을 보내는 행위도 손으로 공을 터치하는 반칙도 지금은 크로스, 핸드볼 파울이라 한다. 이유야 어찌 됐든 새로운 표현은 가끔 어색하다.
TV도 마찬가지다. 방송 언어에 대한 규칙인지 습관인지는 몰라도 업계 종사자들은 여전히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발음한다. 그들은 짜장을 짜장이라 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된소리는 상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발음에 주저한다고 했다. 내 기준에서 '자장면'은 양념이 부족해 허옇게 비벼질 것 같고, '효과'라는 발음보다는 '효꽈'가 진짜 더 효과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아마도 메시지만큼 메신저의 이미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된소리 기피 현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두 표현다 문제 될 건 없다. 일상과 괴리가 느껴질 뿐이다. 올림픽이었나? 월드컵이었나? 그때쯤 들었던 해설 멘트도 생각난다. "포디움 최상단에 섰습니다.", "에너지 레벨을 올려 볼륨을 더 살려야 합니다.", "피지컬적인 부분을 살려 콤팩트하게 맞서야 합니다." 어른들과 TV를 보다 생각했다. '어른들은 저 말이 익숙할까?' 나 역시 단어는 익숙해도 표현 자체가 친숙하진 않았다. 물론 외래어 사용을 지양하는 건 아니다. 스포츠 문화도 수시로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이나 용어 사용은 필요하다. 또 스피커의 신뢰 향상을 위해 전문용어와 업계 용어를 그때그때 써주는 것도 맞다. 다만 우리 같은 일반적 시청자들이 따라올 수 있게 속도를 조절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기존 용어에서 새 표현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는 작은 언급이나 친절한 설명이 있었으면 한다. 말은 당대 사람들의 시간과 정서를 함축하는 나름의 암묵적 룰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소멸하지 않고 공간에 쌓인다' 건축가들의 말이다.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는지, 돌아 돌아 순환하는지는 몰라도 소멸하는 순간순간의 아쉬움을 멋지게 장식한 문장이다. 오래된 유적지나 문화재를 볼 때면 때때로 당대의 풍경이 그려지는 그런 느낌이다. 천년 사찰, 오백 년 된 성당, 19세기 기차역, 700백 년 된 나무 등은 단순한 감탄을 넘어 우리를 휴먼스케일 이상의 시공으로 데려간다. 사라지지 않고 축적된 시간의 향기를 공간이 머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수동과 문래동, 을지로와 종로로 이어지는 서울의 뉴트로 열풍도 장소 그 자체가 주는 멋도 있지만 더 깊은 곳에는 그곳 거리와 거기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오래된 역사와 이야기가 시간의 층 위에 누적돼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리고 이 같은 예스러움의 퇴적들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다른 멋, 편안함, 위로로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심지어 2000년 이후 이 땅에 태어나 자신이 본 적도 없는 버블 이전의 도쿄를 동경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장소와 공간의 급속한 변화는 모종의 노스탤지어를 낳는가 보다. 도시의 세련됨과 고독을 적절하게 표현한 시티팝 열풍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어쩌면 무분별하게 허물어지고 새로 지어지는 이 땅의 토목과 건축 환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고향 상실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남아 있는 거리에서 과거를 찾고 작은 위로를 받는 것은 아닐까. 혼자 국밥집에서 소주를 기울이고 있는 중년 남성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오래된 공간의 상실과 잃어버린 장소의 부재도 함께 느껴진다. 말과 글, 공간과 장소 모두에서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다.
새로운 말은 세대와 정체성을 구분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조어와 유행어는 그래서 자녀보다 어른들이, 평사원보다 부장들이 더 따라 하려고 난리다. 세대 구분을 뒤처진 유행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세대들은 이걸 따로 학습하지 않는다. 생활 세계가 이미 자기들만의 은어와 약어, 암호화와 복호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다른 세대와의 분리된 정체감과 소속감을 갖는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면 모든 세대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확보하고 다른 세대의 출현으로 기존 세계를 양보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도 인간 최고의 발명은 '죽음'이라고 했다. 새로운 눈을 가진 세대가 기존의 것을 새롭게 재편하는 창의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전히 법과 제도 같은 주류 사회는 기성언어로 공고화돼 있다.) 언어는 시간을 함축하고 세대를 재편한다. '헤더' 보다 '헤딩'에 통쾌함을 느끼는 나도 그래서 이전 세계와의 작별에 더 큰 아쉬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음으로 끝나는 Hearer보다 모음으로 끝나는 Heading이 발음상 더 힘줄 수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말의 맛이 더 '쎄게' 느껴진다. 영어 의성어는 몰라도 한글 의성, 의태어들은 거의 다 받침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깡충깡충, 엉금엉금, 만지작만지작, 첨벙첨벙' 대부분 다 받침으로 끝나기에 그 매조지하는 말의 맛이 더 아쉽게 다가온다. 맵고 짜고 단 어감만을 좇지 말고 말도 편식 없이 고루 써야겠다. 흘러가는 말을 보며 시대의 유속을 느낀다. 시대의 유속에서 혹여나 느낄 수 있는 다른 세대의 소외감이 최소화되길 그래서 확장된 세계를 함께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길. 꿩과 알, 누이도 매부도 같이 먹으면 좋지 아니한가? 음.. 이상한 생각을 이상하게 했더니 이상하게도 몹시 출출하다. 모카포트로 보일링한 에스프레소, 데미타쎄에 락토 페어링으로 한잔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