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 44분 44초

by 배준현

광화문을 지나 서촌으로 향하는 길. 빨간 노을이 서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유리로 된 건물 외벽도 붉게 물든다. 가끔 구름이 멈출 때면 건물은 살구색으로 변했다가 강렬한 노란색이 됐다가 다시 감처럼 빨갛게 익는다. 사람들은 건물 외관의 형형색색을 바라보다 건너편 녹색신호를 확인한다. 그리고 길을 건넌다. 나도 따라 건넌다. '대지미술이 뭐 별 건가 도심 속에 이렇게 멋진 파사드가 있는데, 인상주의 화가들도 이런 빛의 향연에서 자신만의 색채를 구현했으리라' 나름 격조 높은 생각을 하던 차, 같이 걷던 친구 D가 말한다. "야! 빨리 건너 죽는다." 신호등 아래에 점등된 숫자는 '4' 헐레벌떡 뛴다. 재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재수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만있다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다행히 세이프. 하지만 나름 고양됐던 감성의 게이지는 바닥났다. 죽음 앞에 정서 없기 때문이다. 단순한 숫자일 뿐인데 우리는 '사'라 읽고 '죽음'을 떠올린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4'에 '死'의 의미를 부여한 게.


오래된 기사에 따르면, 오늘날 '4'에 대한 우리 인식은 일본의 '4 기피 현상'이 전해진 일제잔재의 흔적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전 한국 역사를 보더라도 특별히 '4'를 천대한 기록은 없다. 그랬으면 도성으로 진입하는 문이 과연 4개였을까?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 북대문(숙정문)이 머쓱하다. 사군자도 마찬가지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각각 군자의 인격을 나타내지 않는가? 매난국죽도 덩달아 머쓱해한다. 물론 한자의 중심 중국에서도 '4' 기피 현상이 강하다고 한다. '쓰'라는 발음이 마찬가지로 '넉 四'와 '죽을 死' 모두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물론 '뱀 蛇'도 연결된다.) 어쨌든 한자문화권의 이 같은 미신이 점차 확산하면서 오늘날 우리 인식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은 흔히 말하는 언어의 자의성, 도상성, 추상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의 소리에 여러 다양한 상징들이 결합한 인간의 유희적 놀음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고추밭에 가면 고추 함부로 따먹지 마라.'와 같은 중의적 표현의 일부이기도 한다. (한국인이 아니라면 이 문장을 도둑질과 매운맛 정도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죽음이라는 가장 강력한 상징과 결부되었기에 숫자 '4'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갖는다. 인간사 죽음보다 강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의식하는 순간 사로잡힌다' 강한 인식은 확실함을 제공하지만 넓은 해석 공간을 남기지 않는다. 또한 같은 것의 반복에 집중한다. 선택적 지각과 인지적 편향에 노출되는 것이다. "야, 또 사사사야." 매번 4시 44분을 본다는 친구 D도, 자신이 TV만 켜면 늘 한 골 먹는다는 사람도 모두 유사한 패턴을 그린다. 일종의 징크스와 머피의 법칙을 자가생산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TV만 틀면 실점장면만을 목격하면서 귀납적 데이터를 쌓을 수도 있다. 또 4시 44분에 괴상한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특별히 그 시간을 경계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그 특정 상황을 넓혀보면 모든 징크스와 사건은 해프닝으로 일단락된다. 세상 모든 4월 4일 생들과 4시 44분 44초를 목격한 사람들이 바로 그 증거다. (물론 개별화-전체의 오류일 수도 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이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확인한 시간이 정말 공교롭게도 4시 44분이다! I'm survive.) 의식하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의식하지 않는다. 자꾸만 '4'를 본다는 친구 D에게 나는 시큰둥하게 말한다. "야, 그럼 다음엔 2에 집중해 봐. 2시 22분 그리고 매번 2를 보려고 의식해 봐. 그럼 2가 눈에 들어올걸. 행운의 숫자 2."


기분이 태도가 된다면 찜찜한 기분은 덜어내는 게 맞다. 안 그래도 뜻대로 되지 않은 인생 재수 없는 기운까지 더할 필요는 없다. 44층 없는 63 빌딩도, 4호기 없는 무궁화호도 모두 옳다. 께름칙한 건 걷어내는 게 우선이다. 사고가 났다 하면 큰일이 벌어지는 자동차 번호판에도 '4'를 없애려는 노력은 일견 타당하다. (내 차에는 '4'가 있다.) 4층을 의미하는 F층도 병원 4층은 기계실로 쓴다는 설계구조도 모두 옳다. 여전히 숫자 '4'는 죽음이라는 강력한 상징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전기차나 스마트폰 배터리도 44%가 되면 왠지 모르게 폭발할 것 같다고 하니 '4'를 아예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4'를 멀리하는 건 태도와 기분을 위해서라도 자못 마땅하다. 하지만 '4'를 전연 거부할 수도 없다. 4번 플랫폼에서 지하철 4호선도 타야 하고, 번호판에 4가 들어간 택시나 버스도 타야 한다. 4만 원도 결제해야 하고, 4시간 걸리는 국제선도 타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4업(?)도 하고 4람(?)도 만나고 4랑(?)도 해야 한다. '4 없이 4는 건 4실 불가능하다.'


우리 삶, '4'를 제외하고서는 온전할 수 없다. 동화책 『내가 함께 있을게』의 주제처럼 삶과 가장 가까운 짝은 결국 죽음 아니던가?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어도 삶의 일부인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한다. (노화를 질병으로 보는 관점은 별개로 하자.)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고대 메시지 역시 결국 끝을 인식함으로써 현재에 충실하자는 독려로 읽힌다. 행운의 숫자 7도, 재수 없는 숫자 4도 현생을 잘살자는 인간 희망의 공약수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4'를 두텁게 하는 의미도 여럿 있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는 사통발달이라는 표현도, 동서남북 네 방위도 모두 '4'와 결부돼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도, 100세 시대 가장 균형 잡힌 나이대라는 40대 역시 모두 '4'를 중심으로 한다.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첼로도 ADCG 4개로 현으로 돼 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단일 상징보다 더 많은 의미가 '4'를 둘러싸고 있다. 숫자 4는 완벽함도 상징한다. 사각형 네 개의 변은 다른 어떤 도형보다 안정을 제공한다. 땅을 구획하고 실내 구조를 짤 때도 우리는 가장 먼저 사각형을 염두에 둔다. 위아래, 좌우가 사각 모양에서 가장 안정감을 갖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땅, 집, 방이라는 이 구획된 사각의 공간에서 우리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인간사 대부분이 사실 '4'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4'를 바라보는 나, 즉 제5의 관점이 몹시 중요해진다. 마치 땅, 불, 바람, 흙 이 네 가지 원소를 완벽하게 해주는 '제5원소'의 존재처럼 말이다. 내 눈으로 스케치한 그날의 서촌처럼 다채롭게 채색한 이야기는 해석을 다양성을 제공한다. 해석의 다양성은 다시 세계관의 유연함을 가져온다. 세계관의 유연함은 고정된 관념이 아닌 변주의 여유를 준다. 외면과 봉쇄, 적극적 해석과 두터운 묘사가 모두 나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의 찬미도 사의 저주도 모두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탕이나 먹자!

이전 13화떠내려가는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