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최종면접 날. 서류와 필기시험, 인적성과 1차 면접을 통과한 나는 최종합격을 당연시하며 빨리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떨림과 긴장도 있었지만 이미 1차 면접 때 확인한 경쟁자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자신감이 뿜뿜 했다. 나는 당당했고 또박또박했으며 막힘없고 유려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 충격에 휩싸이기보다 믿었던 나의 믿음에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정말? 진짜?' 허탈함은 믿음의 크기에 비례했다. 완벽했던 믿음만큼 완벽하게 퇴로를 차단한 나는 갈 곳도 잃고 플랜 B도 무실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합격자 연수가 시작되기 전까지 이상한 상상을 종종 했다. '추가합격 전화가 올 거야. 지금은 떨어졌지만 언젠가 저 회사에서 일할 날이 오지 않을까?'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시나리오를 꽤나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써 내려갔다. 쉬이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당치도 않은 이 같은 믿음을 꽤 오래 가져갔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물론 준비된 자신감과 확신의 잔상 같은 아쉬움의 덩어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탈락 이후의 상황을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강력한 믿음은 불안의 크기와 꼭 닮아 있었다. 불안의 자리에 믿음을 도킹하면 모양과 크기가 일치했다. 불안한 만큼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합격이 곧 종착이라고 여기던 내 마음을 한가득 담아놨는데, 그 큰 그릇이 깨진 기분이었다. 믿음은 삽시간에 흘러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상태로 떠내려갔다. 믿음은 끝났다. 유효기간이 도래했다. 대신 불안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건 뭘 해도 되는 사주야. 그냥 막살어. 다 되니까." 친구 진은 종종 자기 사주를 풀이한 분석가의 말을 전하며 운세를 자랑했다. 그리고 팔자 좋은 자기 인생에 스스로 감격한다. "심지어 나랑 엮이기만 해도 잘 될 거야." 옆에서 보면 여덟 글자에 인생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하는 사주팔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저 태도가 아주 얄밉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평소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사판처럼 다른 이야기는 튕겨내는 진이 '뭐든 된다'는 저 이야기만큼은 강력하게 흡수하는 걸 보고 내심 부러워한 적도 있다. 실제로 입사부터 승진, 건강과 가족 원하는 대로 착착착 이루어내는 진을 보고 '믿는다는 것'의 힘을 간접체험하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말년이 좋다고 한다. 100세 시대 이런 사주가 가장 복 받은 사주라고도 했다. 다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건 별도다.) 진의 말마따나 누적된 임상 경험과 통계적 수치를 바탕으로 일종의 반(half) 과학적 풀이를 한다는 명리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질적, 양적 연구의 흔적이 아주 언뜻언뜻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미신, 미신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미래를 점치는 점성술과 거리두기에 열일인 사람들은 '사주에 대한 믿음' 보다 '미신에 대한 불신의 믿음'을 선택한다. 그만큼 믿음은 다양하고 선별적이며 자유롭다. 믿는 자에게 복이, 믿지 않는 자에게 더 큰 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개인적 믿음은 정당하다. 강요하거나 강요된 믿음만 아니라면. 모든 사람에게 복 있을진저!
운칠기삼. 운이 70%, 기세가 30%라는 이 말은 도박판에서만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 일상도 기세와 운에 종종 좌우된다. 말이 좋아 기세지 저것도 사실상 운에 가깝다.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운에 속한다. 그래서 성공학이 아닌 운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를 예정된 조화로 보기도 한다. 사실상 운명론 아닌 숙명론을 취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피나는 노력과 계획, 전략을 택하는 것보다 사주와 신점, 종교에 집착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강력한 믿음만 유지된다면 말이다. 결국 될 놈은 된다는 ‘될놈될 공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남의 운명을 부러워하는 자조적 관찰자가 될 수도 있다. 믿음의 온도에 따라서. (물론 내공 있는 전문가(?)들은 믿음 그 자체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꾸준한 노력을 강조한다. 믿음 그 자체가 뭔가를 이룬다기보다 목표에 도달하는 강력한 추진으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믿음이 능사는 아니다. 고온건조한 믿음은 쉽게 갈림길을 허용하지 않는다. 깨지거나 부서지기도 한다. 유연함도 떨어진다. 하나의 목표, 오직 그분, 하나의 가치관만을 고수한다. 그래서 강력한 믿음은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 서사의 표본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강력한 믿음은 자기 신념과 확고한 태도를 보이며 종교, 국가, 사람, 정당 간 갈등의 첨예한 표본이 되기도 한다. 다른 신념과 믿음은 철저히 차단·봉쇄되기 때문이다. 믿음의 두 얼굴 즉, 양면성이다.
그럼에도 분명 믿음은 효험이 있다. 무엇보다 강력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 나의 인생을 좌우하는 강력한 외부의 힘. 이러한 여러 종류의 외력 앞에 어느 하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찐하게 믿는다는 건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그래서 믿음도 누군가에겐 과학이다. 마치 침대회사의 광고처럼 말이다. 따지고 보면 과학도 믿음을 전제로 한다. 빅뱅과 대멸종, 영장류의 분화,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와 인류 문명의 발전, 역사적 진보와 1년 열두 달 24시간이라는 생활계의 구성 등등 이 모든 것들도 사실은 어느 정도 학습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본적도 들은 적도, 기록되어 있지도 않은 머나먼 과거를 일반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음과 신념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Flat Earth' 신봉자들도 일종의 믿음을 전제로 뭉쳐있다. 또 믿음은 인지적 에너지 낭비를 막는다. 믿는 순간 편안하다. 의심하지 않고 세상의 지식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외우기 버거울 뿐이지 우리 삶의 모호함과 불안감이 상당 부분 해소된다. 심지어 모든 종교와 신화도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과 인류의 현주소를 해석하기 위한 발명이라고 하니 우리 믿음은 생존을 위해 복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늘과 쑥을 먹고 자란 곰의 인내가 우리 민족의 토대가 되었다면 출생의 비밀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물론 이 같은 해석의 자유로움 때문에 여러 믿음이 난무하기도 한다. 또 이런 다양성은 불협화음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해석의 다양성이 믿음의 충돌로 번지는 것이다. 세계의 크고 작은 전쟁이 종교와 신념 때문에 비롯됐다면 다양성은 곧 불신을 야기하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세계 분쟁의 이면에는 자원과 경제 즉 이권 다툼이 자리하고 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다른 창세신화인 미륵님과 석가님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불가의 가르침과 음양의 조화, 협력과 공존의 중요성을 더 강조할 수 있다. 단군신화의 키워드인 은근과 끈기보다 협력과 공존의 키워드를 우선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개신교 세계관을 들이댄다면 앞 선 두 신화는 어쩌면 깡그리 무시될 수도 있다. 곰과 호랑이라는 토템과 석가와 미륵이라는 영적 존재가 신의 이름 앞에 그들 표현으로 이단(?)에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믿음은 세상을 다채롭게 수놓기도 하지만 불신의 크기를 자극하기도 한다. 자기 신념에 대한 불신은 다른 가치의 추종이나 박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의 수많은 총기난사와 각종 테러도 사실상 사회적 범죄라는 프레임 이전에 신념 간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믿는 '큐어넌QAnon'의 음모론은 믿음을 기반으로 삽시간에 그들의 중심 내러티브로 자리한다. 가령 인터넷 쇼핑사이트에 올라오는 여자 아이의 이름을 가진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구들이 실제 여자 아이를 거래하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한 예다. 그래서 할리우드 배우와 민주당 인사들이 여자아이들의 피에서 환각물질을 추출하기 위해 그런 파렴치한 짓을 벌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트럼프가 미국에 강림하셨다는 내용으로 썰은 마무리된다. 피식! 하고 말수도 있지만 믿음의 강도가 세지면 현실의 장도 변하기 마련이다. 지난 미국 대선 바이든의 승리를 부정했던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의회를 점거했던 활약상을 떠올려 보면 논리성과 합리성은 믿음 앞에 꼼짝도 하지 못한다. 믿음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건 얼마나 믿느냐에 달려있다. 얼마나. 뿐만 아니다. 강력한 믿음은 이른바 협소한 가치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하는 정체성 정치의 출현을 야기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바탕으로 공공의 정체성을 일치화시켜 정치를 사유화하는 믿음의 조작과 설포가 자행된다. 다른 믿음과 가치는 말살된다. 믿음의 제노사이드화다. 신념의 독점을 통해 다른 가치의 유통을 원천 차단한다. (이런 점에서 히틀러와 네타냐후는 믿음이 같다. 같은 신도들이다. 최근 득세하는 세계의 극우주의도 눈여겨봐야 한다.)
물론 우리에겐 유연함도 있다. 때론 근사한 남의 믿음에 눈이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면 움직인다. 우리가 자기계발서를 읽고 따라 하는 것도 신념의 동기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락방도 없는데 꿈꾸려고 하고, 말도 안 통하는 고래에게 칭찬도 건네려 한다. 하지만 동시에 믿음의 동기화가 아닌 균열이 생기면 확장된 자기 불안은 다른 믿음을 억제하려는 투쟁으로 번진다. 정의의 사도로 변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저해하는 자들과 맞서 싸우라! 이른바 닫힌 믿음의 강력한 출현을 예고한다. 열린 믿음은 자기 믿음을 고수하지만 타인의 믿음 또한 존중한다. 마음이 푼푼해서가 아니라 존중하지 않을 별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닫힌 믿음은 자기 믿음에 대한 확인을 위해 타인의 동조와 승인을 열망한다. 의존성 짙은 믿음이다. 그래서 다른 믿음을 허용할 수 없다. 이는 오히려 자기 믿음에 대한 진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피학적인 상황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엔 불안과 불신의 큰 공동이 자리하고 있다. 불안의 크기만큼 강력한 믿음을 외치는 것이다 그것도 꼭 남들 앞에서. 그러한 믿음은 못 미덥다. 밉다. (그들이 천국에 꼭 도달하길! ) 의도된, 강요된, 강박적 믿음은 자기 불안을 드러낼 뿐 쉽사리 전달되지 않는다. 구원을 바라는 믿음도 마찬가지로 나약함을 상징할 뿐이다. 마치 최종면접 이후 어떤 '복음'을 기다리던 나의 마음처럼. 결국 모든 믿음은 열린 믿음을 지향할 때 더욱 굳건해진다.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를 인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을 고수할 때 '믿는 자'로써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고독하고 외롭다. 믿음의 문제는 실존적 개인의 중대사만큼이나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오늘도 쉽게 허황된 유토피아 건설을 부르짖는 설교자들에게, 자기 불안의 해소를 위해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저당 잡으려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믿습니까?' "밉습니다!"
노년을 기다리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