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바다로 흐르고 이야기는 대중을 따라 흐른다

계엄에 의한 주제의 변주

by 배준현

<coup ďÉtat & revolution>, concerto for keyboard and mouse No.1 in a major vivace.


경춘선을 타고 강촌에 갔다. 역에서 내려 꽤 걸어올라 가면 아홉 갈래 폭포라는 구곡폭포 입구가 나온다. 가는 길, 은근이 멀다. 옆에서 버스가 쌩쌩 달리면 '저거 탈 걸 그랬나'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사실 폭포는 둘째고 먹는 게 먼저다. 곧장 근처에 있는 문배마을로 갔다. 이삼십 분을 올라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신가네'에서 막걸리와 산채비빔밥, 촌두부를 먹고 내려오는 길에 폭포에 들른다. 폭포 개수가 바로 확인되진 않지만 하나하나 세다 보면 아홉 개의 물줄기가 대략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낙하하는 모든 물은 폭포 아래 한 곳에 인다. 마치 강물이 바다를 향하듯이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물줄기가 저들끼리의 불협화음을 마치고 폭포 아래에서 회합하는 것 같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날리는 물줄기에 시원함을 느끼고 이런저런 한심한 생각도 한다. '왜 물은 꼭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 당연한 물리적 이치지만 어릴 때는 호기심이 넘쳤다. 어쩌면 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흔들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인트로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낙하하는 물을 보며 운명과 귀결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지형의 의해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은 정해진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연어는 강물을 거스를 수 있어도 물은 절대로 지형을 거스를 수 없다. 순리이자 이치이고 운명이고 숙명이다. 그냥 응당 그러하기에 그러한 것이다.


12월 3일, 민심이 흐르던 나라의 지형이 크게 흔들렸다. 사람들의 심리적 지반에 큰 구멍을 냈다. 각종 이념과 가치, 라이프 스타일과 세계관이 안 그래도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다 더 깊은 곳에서 지각적 변동을 촉발했다. 분노의 시선은 금세 한 곳에 쏠리며 소실점 집중 현상을 자아냈다. (그래도 얼마만인가?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그때 내 눈은 아시아챔피언스리그 광주 VS 상하이 경기를 향해 있었다. 광주가 완벽한 승리를 앞두고 있었는데 상대 팀의 짜증 나는 경기 운영에 동점골을 허용했다. 그때 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계엄이래." 이건 또 뭐야. 나도 얼른 사회의 소실점에 합류한다. 안 그래도 퍽퍽한 한국사회인데 그것까지 묻고 군인통치까지 더블로 가려고 했다. 다행히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했다. 그리고 탄핵실패. 군인들의 발언과 각종 주장 및 증거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다시 탄핵 재표결을 앞두고 있다. 이게 당장 우리가 처해있는 지금 현재의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지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혁명상태라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다수가 합의한 사회 지형을 완강히 거부하던 입장과 의견이 노메이크업 상태로 출몰했다. 짐작은 했지만 쉬이 재단하지 못했던 여러 반사회적 집단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근본적 합의를 이루고 있는 최근저의 지형을 또다시 다수가 확인하고 있다. 잊어버린 최소한의 합의와 공동체의 힘을 서로를 통해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탄핵국면에서 2024년 한국 사회의 단단한 지형 분석이 정밀하게 뤄지고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깊은 물보다 한참 얕은 인간의 마음이지만 그 방향이 시시각각 휙휙 바뀌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일방향으로 흐르는 물은 범람의 위험이 있지만 늘 한결같다. 물은 불확실성을 최소화한다. 흐를 곳으로 흘러간다. 반면 사람의 마음은 불확실성과 애매모호함 그 자체다. 심지어 본인도 본인의 마음을 잘 모른다. 이 같은 불확실성을 우리는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계엄이라는 병정놀이를 마친 이 양복 입은 심리적 고교생들도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 결국 부족 집단의 정신상태로 급히 회귀했다.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공통점을 통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환상을 서로에게 제공하면서 불확실성을 최소화했다. 이렇게 확실성은 투자와 경제 영역에서만 기피하는 게 아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특성은 거의 본능적 회피에 가깝다. 이도저도 아닌 날보다 해가 뜨거나 눈비 오는 날이 예보하기에도 더 좋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함은 원만함을 보여주는 사회적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자칫 기계적 중립으로 비친다면 회색분자 같은 느낌을 주면서 암묵적 기피대상이 된다. 불확실함이 뇌리에 박히면서 일상적 에너지를 좀먹기 때문이다. 이 같은 캐릭터들은 '지금' 함께할 수는 있지만 '오래' 같이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최종 판단이 내려진다. 술에서도 간색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중심색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스테이크 옆의 가니쉬처럼 말 그대로 들여지거나 버려진다. 어쨌든 곧 사라진다. (물론 대체재도 금방 나온다ㅠ)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우리 인간은 원인과 결과 즉 인과관계 마련을 통해 상황을 설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시뮬레이션을 끊임없이 돌리는 것이다. 계엄 시나리오도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더 치밀하고 경악스러움 그 자체였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모호함과 불안, 실패를 헷징 하기 위해 그들 역시도 이야기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야기하는 동물(Homo Narrans)다. 이 동물은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경계한다. 그래서 가능한 상상력을 총 동원해 논리의 빈 공간을 적극적으로 메워간다. 필요하다면 무속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기괴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자기 이야기에 스로도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천둥번개가 치고 산불이 나는 이유를 토르 신의 분노로 설명하면 불안과 공포는 설명가능한 이야기로 전환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가설 단계에서 상상력은 절대적인 필요 요건이다. 감각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루이 파스퇴르의 세균 이론도,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과 진화론 모두 관찰과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무한히 확장한 결과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이야기 역시 결국 수에서 다수의 바람대로 흘러간다. 넓고 깊은 지점을 향하는 것이다. 빈약한 서사는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실에서 모의한 그들의 시나리오가 결코 수용되지 않는 이유다. 강물이 바다를 향하듯 이야기 역시 넓은 공간을 원한다.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길을 고 갈 추진을 잃고 만다. 협소한 내러티브는 결국 고여서 썩기 마련이다. 사회의 내러티브는 결국 구성원이 합의한 지형에 따라 흐르게 된다. 창한 수사 없이 그냥 그게 시대정신이 사회정신이다. 시대의 두터운 서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다수의 바람이라 해도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이야기도 물처럼 범람하고 새나가기 하고 때론 누수현상도 일어난다. 그래도 변치 않는 게 하나 있다면 이야기도 물도 코 주어진 지형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2024년 현재의 지형을 리 모두 확인했듯 국 시대의 이야기는 흘러갈 곳으로 흘러다. 비록 좀 더지라도 강물 바다 향하 이야기는 대중(multitude)의 마음을 따라 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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