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돈키호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단 나는 못 읽었다는 점. 서양 문학이라는 점. 방대하다는 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식의 흐름을 설명하는 '마들렌 씬'으로도 아주 유명하다. 의식의 흐름은 인과관계없는 널뛰고 날뛰는 우리의 생각을 일컫는 심리학적 용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다-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빠르다-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다-높은 것은 산'. (어? 인과관계가 은근히 있다. 어쨌든.) 이 같은 무의미의 연속이 인간 생각의 기본적 형식이라는 게 의식의 흐름의 주된 설명이다. 작품에서는 이렇다. 주인공이 마들렌이 들어 있는 홍차를 숟가락으로 떠먹음과 동시에 과거의 추억으로 젖어든다. 그러니까 마들렌 향이라는 후각과 홍차의 맛이라는 미각이 자기도 생각지 못했던 옛 추억이라는 먼 의식과 바로 브릿지되는 것이다. 어쨌든 가장 유명한 저 구절에서 먹는 행위와 추억의 관계를 떠올려볼 수 있다. 감각과 의식의 직렬적 연결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는 말도 성립한다. 음식과 기억의 연결, 막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책의 주인공처럼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것도 같은 유럽땅에서.
때는 바야흐로 2016년 10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쌀쌀한 베를린 밤거리. 아무도 모르는 이 회색도시에 쓸쓸히 도착한 나는 서둘러 숙소 체크인을 마쳤다. 배도 고프고, 춥고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생각났다. 내가 모르는 건지 진짜 없는 건지 유럽에서 뭔가 따뜻한 국물요리를 찾기란 정말 어려웠다. 그날따라 밤도 길게 느껴졌고, 공기도 한층 더 차가웠다. 뜨끈한 국물이 더더욱 땡겼다. 그때 숙소 거실에서 만난 어느 한국 분이 건너에 있는 쌀국숫집을 추천해 주었다. 춥고, 배고프고 국물이 먹고 싶었던 나는 잴 것 없이 '이거다'하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위다웃 코리안더(고수 빼고)'를 외치고, 동전이랑 지폐랑 해서 밥값을 계산했다. 드디어 따뜻한 고기 육수 한 모금. '고향의 맛'이 느껴진다. 베트남 사람들의 소울푸드가 내 영혼의 순대국밥처럼 큰 위로가 된다. 아삭한 숙주와 쌀면을 집어 한 젓가락 후루룩한다. 그러자 마치 따뜻한 집처럼 식당이 정겹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자주 가던 극장 옆 쌀국숫집도 생각났다. 잃어버린 시간은 아니었지만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따뜻했던 나의 과거를 고기 육수가 빠르게 소환했다. 낯선 곳의 쓸쓸함과 차가움이 음식의 따뜻함과 추억으로 데워지고 채워졌다. 여행할 마음도 다시 리셋됐다. 그래서인지 베를린은 나에게 쌀국수로 수렴된다. 그 이후로 나는 쌀국수를 먹을 때면 언제나 베를린을 떠올린다. 그럼 그때의 따뜻한 기억이 토핑처럼 더해진다. 먼 타국에서의 기억 한 스푼은 언제나 쌀국수의 풍미를 진하게 해 준다.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가상 시즈닝이다. 2024년 12월 서울의 밤. 다시 쌀국수 한 젓가락. 베를린에서의 훈훈한 기억이 맛의 절반이 돼 내 입맛의 풍성함을 완성한다. '기억'이라는 토핑은 웬만해서는 실패가 없다. 쌀국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음식에 추억을 더하고 싶어졌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먹고 있지만, 내 기분은 '그때 거기'와도 함께하고 있었다. 시간의 풍부함이 곧 맛의 풍부함이었다. 적어도 내 입맛에서는.
베를린과 쌀국수를 떠올리다 보니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바로 '오믈렛 이야기'다. 역시 맛과 기억에 관한 일화다. 살짝 변주해서 정리하자면 춥고, 배고프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서 부족한 재료로 만든 전쟁터의 오믈렛이 왕은 다시 먹고 싶어졌다. 전쟁에서 승리한 왕은 궁으로 돌아와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을 모아 그때의 맛을 재현하라고 명한다. 성공하면 자신의 전재산을 주고 실패하면 목숨이 달아날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재료와 좋은 환경에서 요리사들은 최선을 다해 요리했다. 하지만 왕은 그때의 맛이 아니라며 거듭 불평했다. 그러자 한 요리사가 말했다. "왕이시여, 맛으로는 이미 그때를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의 배고픔과 추위, 불안함, 모든 것을 나누고자 하는 형제애, 자신보다 타인을 아꼈던 그 전우애를 부엌에서 재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음식은 부엌에서 완성되지만 맛은 왕의 추억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니 그만 제 목을 치소서." 참 예민했던 왕은 훌륭한 음식을 앞에 두고도 분위기 타령을 하며 감각이 아닌 의식의 완성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그때의 장소, 시간, 사람들, 분위기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불편한 상대, 기분 나쁜 서빙, 시끄러운 음악, 청결하지 않은 테이블은 맛의 절정을 누락시키는 주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것에 더 진심이고 싶어졌다. 그냥 배달시켜서 빨리빨리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는 행위에 기억을 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행복의 크기는 자기 집 평수에 비례할 수도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나는 주방의 크기, 식탁의 크기에 의해 좌우될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넓은 방보다 함께 요리하고 같이 먹는 쾌적한 공간에 내 마음이 더 끌리는 이유다. (아, 물론 같이 할 수 있는 편안하고 따뜻한 상대를 만나는 건 별개다. 어쩌면 이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도 모른다.) 결국 먹는 행위 그 자체도 매우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일상의 따뜻한 기억과 추억의 평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만 때론 '경후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방금 봤던 경치도 이야기하고, 함께 찍은 사진도 보면서 더 맛있게 식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자 그리고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