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가는 김치찌개집이 있다. 묵은지랑 돼지목살이 맛의 비법이다. 재료가 좋다. 반찬은 날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계란말이, 어묵볶음, 오이무침은 거의 기본값으로 나온다. 갈 때마다 나는 밥이랑 함께 이 세 가지 반찬을 리필한다. 볶음김치 맛이 나는 잘 익은 김치와 좋은 돼지고기가 우려낸 국물은 그야말로 공깃밥을 싹스리하기에 충분하다. 나 말고도 웬만하면 거의 다 밥이나 반찬, 라면사리를 추가 주문한다. 심지어 라면 사리를 제외한 나머진 다 무료다. 깨끗한 대접에 새로 담긴 하얀 쌀밥을 보면 사장님의 깔끔함과 친절함이 느껴진다. 맛으로도 이미 충분하지만 그 정성이 더해지면 내가 시킨 추가분은 남김없이 비워야겠다는 아주 쉬운 다짐을 새로 한다. 그런데 모두가 내 맘 같진 않나 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보면 가끔 다른 테이블에 쌓여있는 추가 반찬이 눈에 들어온다. 첫 세팅된 반찬은 그렇다 쳐도 추가 음식을 남기는 건 쉬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것도 꽤 많은 양을. '그러면 아예 주문을 말지'라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는 오지랖 떤다 할지 모르지만 질 좋은 반찬은 물론 공깃밥을 무료로 주는 집이 요즘 세상 어디 흔한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거창한 표현이 나의 단골집에 해당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 이런 집은 손님도 나서서 사장님 정책(?)에 부합된 식사 예절을 갖춰야 한다. '단골이 맛집을 만든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같은 고마움에 대한 표현으로 나는 웬만하면 깔끔한 완식을 고집한다.
'쌀 한 톨에도 농민의 땀이 서려있다 그러니 남기면 안 된다.' 과거 밥상머리 교육의 No.1 매크로다. 사실 나는 들어본 적 없는 표현이기도 하다. 젓가락질 지적은 받았지만. (물론 지금은 젓가락질을 매우 잘한다. 포크 문화권에서 젓가락 쓸 때는 심지어 우아하기까지 하다. 물론 전적으로 내 착각이다.) 잔반 교육은 부모님께 따로 듣지 않았다.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기는 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급식도, 셀프서비스도 나는 내가 떠온 음식은 국물을 제외하고는 남기는 법이 거의 없었다. 거의. 어쨌든 어른들의 이 같은 식사교육은 누가 추수한지도 모르는 쌀이지만 우리가 쉽게 먹는 데까지는 많은 사람의 노동이 투입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먹는 이 하루 두세 번의 행위에 대한 타인의 노동과 연결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소중한 가르침인 것이다. 땅을 정리하고 모판을 준비하고, 물을 대고, 잡풀을 제거하고, 추수하고, 탈곡하고, 양곡 하고, 유통하는 이 모든 과정에 내 역할은 '구입'과 '소비'다. 따라서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이 무브먼트에 나의 소비가 최종완결을 지닌다면 나도 남김없이 먹음으로써 이 모두의 노력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그게 진짜 '밸류 체인'의 가치에 부합된 태도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소비지향적 어록을 빌린다면 잘 존재하기 위해서는 잘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스머프’라는 만화를 생각하면 나는 독버섯이 떠오른다. 귀엽게 보이는 파란색 캐릭터들이 어째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산에서 야생버섯을 볼 때면 스머프-독버섯-죽음으로 연결됐다. 야생버섯을 먹다가 사망한 뉴스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다 밥상에 놓인 각종 버섯요리를 볼 때면 먹을 수 있는 버섯종류가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깨닫는다. 물론 풀반찬(?)에 대한 나의 지식이 거의 제로 수준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고사리와 시금치, 콩나물과 숙주나물 외에는 다 어렵다.) 버섯도 표고, 새송이, 느타리, 팽이, 목이 정도가 그나마 자주 접하는 종류다. 밥상에 오르는 숫자가 야생에 자라는 숫자 보다도 훨씬 적다. 그만큼 먹을 수 있는 것과 못 먹는 것을 구분하는 작업이 정말 중요했을 거라고 본다. 누군가의 배고픔과 허기가 이것저것을 맛보게 했고 그러다 생존하면 화이트리스트에, 사망케 하면 블랙리스트에 버섯이나 여러 과채의 이름이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판돈으로 걸었던 앞선 사람들의 테스팅 결과에 주목하며 후손들에게 생존의 지혜를 전수했을 것이다. “얘야, 절대 이끼 주변 버섯은 먹지 말거라.” 어쩌면 ‘빨간 신호에는 건너지 마라’와 같은 수준의 교육 지침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우리가 먹는 모든 식재료의 분류 앞에 많은 죽음이 서려 있음을 느낀다.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 두세 번의 하루 루틴이 원시부터 이어진 인류의 응축된 결과라는 걸 받아들인다면 모든 식사 앞에 경건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사 전 종교의식도 납득이 간다. 어쩌면 모든 밥상은 제사상일지도 모른다. 연결된, 함께의, 공식(共食)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혼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밥상이 유구한 커넥티드 밀(connected meal)인 셈이다. 배달 음식마저도.
잘 차려진 밥상 앞에 다시 모든 것들의 연결을 생각한다. 그건 채식주의자건, 육식주의자건 중요하지 않다. 밥상 위에 차려진 생명의 나열 앞에 우리의 포지셔닝은 한결같다. 포식자. 조금 오버하자면 우리 모두는 다른 죽음을 통해 내 삶을 연명한다. (물론 채식과 육식의 감수성을 동일하게 보는 건 절대 아니다.) 채소도 과일도 곡류도 육류도 모두 자기 생의 소멸을 통해 인간 삶에 복무한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은 절대적 의존 상태에 놓여 있다. 삶과 죽음이 연결돼 있다는 말로도 대신할 수 있다. 그래서 불안이 늘 고정값으로 뒤따른다. 텅 빈 선반보다 꽉 찬 냉장고가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음식 사진을 찍느라 바쁜 우리 맘 속에 풍요로운 식탁이 곧 사라질 거라는 공포감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물론 그랬다. 정물화라는 장르는 주변 경광의 빼어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특히 음식과 식재료를 많이 그렸다. 과일과 채소, 밀밭과 보리 밭은 물론 갖가지 도축된 고기를 캔버스에 담았다. 정물화의 영어 표현이 'still life'라는 점을 볼 때, 이미 그 이름에서 '정지된 삶' 즉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최상위 포식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마운 마음을 갖고 최대한 남김없이 잘 먹는 것이다. '이따다끼마쓰(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고독한 중년 미식가의 식전 멘트도 밥상 위의 죽음 앞에 겸허한 연결의 마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루 두세 번의 식사 자리에서 늘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내 밥상에 연결된 수많은 땀과 노력, 생명의 가치를 가끔은 짐작코자 한다. 그럼 내 인생에 혼밥은 절대 없을 것이다.
오늘, 내 밥상은 몇 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