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경영진 인사철이 지나고 국내 주요 기업 경영진 교체 현황을 분석한 영상을 보던 중 반가운 영상을 보게 됐다.
2010년 1월 방영된 SBS 스페셜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 출세만세였다. ‘사람이 미래다’는 문구로 국내외에 위상을 떨치던 두산그룹 총수의 24시간을 밀착 취재한 다큐엔 박용만 당시 두산그룹 회장의 하루 주요 일과가 담겨 있었다.
취재진과 명함을 교환하는 것으로 촬영을 시작한 박용만 회장은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출근 준비를 한다. 아내에게 ‘빨리 갖고 와’라며 밥상 준비를 재촉하고 국수를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대로 넘기며 부각으로 입가심하고 코트를 입은 그는 스스로를 ‘급한 성격 보유자’라 칭한다.
임직원한테도 급한 성격을 보이며 다혈질적 면모를 보인 그도 중요한 결정을 하거나 타인에 메시지를 전할 때는 ‘이 행동’을 거친 후 실행에 옮긴다. 모래시계를 보며 3~5분간 숙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사람이 직급이 올라갈수록 자기 직관에 의한 결정을 하고 그 직관에 의한 결정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 거기서 실수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내가 성격이 좀 급한 것도 (실수가 생길 가능성이 커지는 이유가 되는 면모도) 있다. 그럴 때는 모래시계를 얹어 놓고 모래가 떨어질 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린다.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내가 하려고 했던 게 바뀌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전화를 걸어 야단을 칠까 하다가도 안 하게 되고 이메일에 감정이 실린 문구를 덜 쓰게 된다. 한번 해 봐라. 진짜 다르다.’
두산그룹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그마저도 화를 접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일까. 박용만 회장이 지목한 건 상처다.
‘요즘은 이메일을 많이 쓰지 않냐. 이메일에 감정이 조금이라도 실리면 영원히 글자로 남는다. 받는 사람은 상처가 더 오래 남게 되고 나도 그러한 지시를 내린 것에 대해 후회를 하게 된다.’
한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날린 말과 단어가 임직원에 상처로 남아 경영진과 임직원 간 유대감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실제 박용만 회장은 경영에 있어 유대감과 신뢰를 매우 중시했다. 점심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그는 외국계 금융사 CEO와 만나 근황과 업무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모두가 갖는 점심을 이용해 자신의 기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업 경영진을 만나 친분을 쌓는 것이다. 웃으며 농담도 하고 평소 임직원이나 취재진에 털어놓지 못한 일이나 국제 상황에 대한 사견도 가감 없이 털어놓으며 서로간 신뢰와 유대감을 쌓는다.
기업 경영에 있어 신뢰와 유대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본인 역량으로 풀리지 않는 일도 옆 동료나 이웃 직장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우리나라는 특히 더 그렇다.
미국 등 선진국은 신뢰와 유대감을 목숨처럼 여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KBS 사회적 자본에 출연한 다이아몬드 거래상 마틴 와이넷은 다이아몬드를 보고 거래를 하자는 한국인 거래상에 히브리어로 ‘축하한다. 행운을 빈다’는 뜻의 마잘(Ma-zal)이란 말을 건네며 악수를 한 뒤 다이아몬드를 건넨다. 대금이나 보증 수표 등 어떤 현물도 현장서 바로 받지 않고 악수와 말 한마디만으로 엄청난 가치의 다이아몬드를 건네는 것이다.
마틴 와이넷은 거리낌 없이 다이아몬드를 건넨 이유로 ‘신뢰’를 들었다.
‘마잘이라 말하고 악수를 하면 그것은 곧 신뢰한다는 의미다. 만약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다가 제가 마잘이라고 하면 나는 이 다이아몬드를 가져갈 수 있다. 왜냐면 이는 거래의 끝이니까. 마잘은 거래의 끝을 의미한다.’
마틴 와이넷과 거래하는 또 다른 거래상은 신뢰를 ‘그 어떤 것보다 믿을만 한 것’이라 칭한다.
‘우리의 악수는 종이에 적힌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믿을만하다. 당신의 평판이 좋다면 사무실에 와서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다. 평판이 좋기 때문에 물건 가격이 1000달러든 50만 달러든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가 없다.’
실제 미국 사회서 신뢰는 돈과 직결된다. 미국엔 우리나라 신용점수와 같은 ‘크레디트 포인트’가 있다. 거래나 상환 실적 등을 종합해 신용점수를 매기고 ‘어디서 얼마만큼을 몇 번에 걸쳐 빌려줄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얼마나 큰 액수의 거래를 할 수 있는지’까지 책정한다.
미국서 크레디트 포인트가 없으면 집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원하는 품목을 마음대로 구매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결제한도’와 비슷한 것이다.
신뢰와 유대감은 외교서도 중요하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협상 과정서 서로간 접점을 만들며 신뢰와 유대감을 쌓으면 한 발짝씩 양보하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 대표 사례가 1949년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휴전협정이다.
[사진출처=픽사베이]
파리 평화회의 결정대로 팔레스타인을 유태인이 거주하는 지역과 아랍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분리하자는 국제연합(UN) 중재 협상이 실패하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하고 이집트 주도 하에 있는 아랍국가를 공격했다.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UN은 4주간의 휴전을 결정했지만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재공격으로 전쟁은 격화 양상을 보였다. 양국간 전쟁으로 1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UN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도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휴전 협상에 참가하라며 압력을 가한다.
협상에 중재인으로 참가한 이는 랠프 번치. 번치는 서로 복도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시선을 피하고 외면하는 각국 대표들을 향해 쓴소리를 던진다.
‘여러분들은 협상하려 이곳에 왔다. 협상을 하려면 서로가 만나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그간 삽살개처럼 양쪽을 오고 가는데 이골이 났다. 여러분은 만남과 대화도 없이 평화가 이뤄졌던 예를 들어본 적 있는가.’
번치의 노력으로 합의문 초안이 만들어졌지만 협상 진전 속도는 여전히 더뎠다. 이때 번치는 협상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다.
이스라엘·이집트·UN 대표단과 저녁 식사 후 당구대로 가 게임을 하는 것이다. 게임서 패한 팀이 술과 안주를 사서 갖고 와 대화를 나눴다. 이는 서로간 긴장을 풀고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949년 2월 24일 로즈 호텔서 휴전협정을 체결했고 이스라엘은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와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로 번치는 1950년 윈스턴 처칠, 조지 마샬 등 히틀러와 공산주의로부터 서방세계를 구한 인물들을 제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출처=위대한 협상, 저자 프레드리크 스탠턴]
신뢰와 유대감은 지능형 동물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인류의 가장 기초적이면서 본능적인 요소다. 신뢰·유대감 유무 여부는 오늘날 사회서 나란 존재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차대한 요소기도 하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누구도 모른다. 오늘 내가 카페서 길에서 교회서 어딘가서 마주친 누군가가 훗날 나란 존재와 어떻게 마주칠지, 또 어떤 영향을 펼칠지. 신뢰와 유대감이 오늘날 사회서 무서운 요소로 통용되는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