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았던 2024년을 보내고 새해 설을 맞았다.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중 과거 힘들었던 얘기가 오고갔다. 다름 아닌 아버지와 작은큰아버지, 큰아버지가 시골서 어렵게 크며 공부했던 얘기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지겹도록 들어서 이미 시나리오를 다 알고 있지만 같은 얘기여도 큰아버지나 작은큰아버지께 들으면 새롭게 다가왔다. 중간중간 아버지께 듣지 못했던 얘기도 들으면 어느새 담소에 빠져들곤 했다.
이북서 넘어온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밑천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 맨바닥서 농사일을 하며 아버지와 작은큰아버지, 큰아버지를 키우셨단 얘기를 들을 때마다 뭉클한 감정이 마음을 꿰뚫었다. 전쟁을 치르며 사회 기반시설이 모조리 파괴된 세계 최빈곤 국가서 자원같은 밑천 없이 오로지 기술 경쟁력으로 가난을 벗었다는 말은 아직도 가슴 속 한켠에 남아 있다.
친척분이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주먹구구식 ‘맨땅에 헤딩’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석유나 천연가스가 풍부해 별다른 정유 기술 없이 자원만 팔아도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중동·남미 자원부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 최빈곤 국가다.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됐을 땐 공업 시설 등 인프라를 지을 돈이 부족해 외국서 자본을 끌어왔다. 이역만리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 외자를 벌어오게 했다. 심지어 이들의 월급은 독일 외자를 빌려오기 위한 담보로 제공되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등 우리나라 사회기반시설을 짓기 위해 필요한 외자를 빌려오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철강 강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졌다. 포항제철 설립자 고 박태준 전 국무총리는 제철소 건립을 위한 자금을 빌려오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가 기업 회장을 밤늦게까지 설득했지만 거절당했다.
먼 타국으로 날아와 눈앞서 간곡히 호소한 박태준 사장이 안쓰러웠던 미국 코퍼스의 포이 회장은 ‘당신 너무 지쳐보인다. 좀 쉬다 와라’며 하와이 고급콘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와이 콘도서도 자금 마련을 구상하던 박태준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립에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 이 아이디어를 보고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기막힌 아이디어’라며 칭찬했다.
대일청구권 자금 조달에 성공한 박태준 사장은 제철소 건립을 위한 첫 삽을 뜨기 전 포항 영일만 일대에 전 사원을 모아놓고 ‘이 돈은 우리 조상 핏값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결의했다. 일본 식민지배 배상금으로 짓는 기업인만큼 국가를 부흥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단호함에서 나온 말이었다.
무자원 무기반시설이란 최악의 환경서 외국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 인프라를 확보하고 기술 경쟁력을 갖추게 된 우리나라는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사진출처=위키미디어]
세계서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서 기여하는 나라로 변모했고 중견국 외교 협의체 믹타 정회원국이자 2025년 기준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활동하는 당당한 세계 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2010년엔 세계 주요 20개국(G20) 회의를 서울서 개최해 세계 수장들을 한 곳에 부르는 당당한 의장국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처럼 아무 자원·기반 없이 맨땅서 경제 성장을 이룩한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천혜의 자원을 보유했음에도 세계 최빈곤으로 전락한 나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태평양 섬나라 나우루 공화국이다.
나우루 공화국은 오세아니아 미크로네시아에 위치한 세계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다. 인구가 1만 명 남짓한 매우 작은 나라다. 18세기 말 유럽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진 원주민이 사는 평화로운 남태평양 섬나라였다.
19세기 유럽인이 왕래하며 원주민에 무기를 전래했고 원주민은 무기로 이웃 부족을 죽이는 싸움을 벌였다. 부족 간 내분으로 힘을 모으지 못했던 나우루 공화국은 19세기 말 독일에 점령당했다. 이후 20세기 중반 영연방과 합의해 독립하기까지 100여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다.
나우루 공화국이 독립 후 의존했던 사업은 섬에 분포한 인광석을 캐 외국에 파는 것이었다. 나우루 공화국에 분포된 인광석은 태평양을 날아다니며 사는 새들의 똥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농업 비료에 필요한 다량의 인산염이 포함돼 다수 국가가 나우루 공화국 인광석을 수입했다. 참고로 나우루 공화국 인광석은 순도 90% 이상 인산염이 포함된 고급 광석이다.
한해 최고 200만 톤(t)의 인광석을 캐내 수출한 나우루 공화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기는 태평양 최대 부국으로 등극했다. 한땐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질렀을 정도로 정말 잘 사는 나라로 변모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당시 나우루 공화국 국민은 개인 전용기를 타고 다니며 해외로 쇼핑을 하러 다녔다. 외제차는 물론 명품도 거침없이 사들였고 이웃 국가인 호주에 원정 의료 서비스를 받으러 다니며 ‘사치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문제는 인광석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터지기 시작했다. 인광석을 캐내는 것 외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산업군이 전무했던 나우루 공화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500달러까지 떨어지며 빈국으로 전락했다.
인광석을 캐낸 돈으로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다른 산업군을 키우지 않고 사치와 뱃속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결과물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돈이 없어 외국서 석유를 사오지 못하자 외제차엔 먼지만 쌓여갔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과거로 복귀를 위해 소위 ‘일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고 호주로 입국을 원하는 난민들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 ‘난민수용소’로 생계를 이어갔다.
나우루 공화국은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은 과거로 복귀는커녕 1만 달러도 근근히 넘기는 빈곤국으로 전락했다. 2022년엔 1인당 GDP가 9959만 달러로 세계 193위에 속했다.
세계서 석유가 가장 많이 매장된 나라 베네수엘라도 자원 부국서 경제 최빈국으로 몰락한 대표적 경우로 꼽힌다. 1998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고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원유, 철강 등 기간 산업을 국유화해 단기간에 많은 자금을 확보했다.
2000년대 중반 고유가 기조가 유지되며 석유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자 차베스 정부는 석유 판 돈을 국민 복지에 대대적으로 투입하며 민심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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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차베스가 암으로 사망한 뒤 2015년경 미국발 셰일가스 혁명이 터지며 세계 유가가 하락세로 접어들자 베네수엘라는 복지로 쓸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외국 부채를 갚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석유를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정유 기술 등 근본적 기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추출 기반시설이 노후화되며 석유로 제대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베네수엘라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과도하게 돈을 찍어냈다.
이는 화폐 가치 급락과 65000%의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기존 1달러로 구매할 수 있던 물품을 650달러를 지불해야 구매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생필품 가격이 급등했고 국민 생활은 매우 어려워졌다. 여기에 차베스 후임 마두로 정부가 미국 셰일가스 혁명에 대응하기 위해 원유 생산량을 늘린다고 발표하자 당시 정권이던 미국 트럼프 정부는 베네수엘라에 대규모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는 경제 상황을 악화일로로 치닫게 만들었다. 여기에 사회 치안 불안까지 더해지자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선진국들은 베네수엘라를 여행제한 국가로 설정하며 자국민 방문을 자제시켰다. 이에 여행 등 관광 산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세계 최대의 석유 보유국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치안서도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자원은 지구가 인류에게 준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도 어디까지나 물량이 제한된 ‘한정적인 선물’이다. 적게는 수십년 많게는 수백년 후엔 없어질 ‘임시적 선물’이기도 하다. 이 임시적 선물에 기대 자체 기술이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후손마저 빈곤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최악의 결과물’을 도출하게 된다. 자원이 선물이 아닌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단 의미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운 좋게 자원을 캐내 경제적 부와 기회를 가진다면 그 기회를 또 다른 기회로 만들어 내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자원이 아닌 국가, 즉 국민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해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또 다른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미래 먹기리인 신사업군을 키우고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자원을 재앙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하루라도 빨리 자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지금 갖고 있는 자원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란 착각만큼 내 자신을 깎아먹는 건 이세상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