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 포함 역대 어느 정부서도 이념에 상관없이 강조한 게 있다.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과밀화 해소다.
지역균형발전의 핵심은 수도권에 집중된 정치 권력·경제 자본 파이를 지방에 나눠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정치적 기회를 지방서도 누릴 수 있게 한다. 수도권 주민들이 ‘이 정도 여건이면 지방에 사는것도 나쁘지 않은데’라고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서 갈등으로 대변된 극심한 지역 경제 빈부격차를 겪어왔다. 박정희 정부 당시 경부고속도로와 주요 산업단지를 영남지방에 지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호남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영남 주민들보다 경제적 기회서 소외됐단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상대적으로 외면받던 호남지역에 많은 경제 인프라가 들어섰다. 2002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이 열렸던 광주월드컵경기장이 대표적이다. 호남고속도로도 확장됐다.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건 영남 주민들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 당시 부산 북 강서을에 출마했던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같은 지역구 후보로 출마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이번 선거서) 노무현 후보가 낙선이 돼야 우리 부산 죽이기를 골몰을 하는 이 김대중 정권이 정신을 차리기 때문입니다”고 발언했다.
공동유세장에 있던 수많은 주민들은 허 후보의 말에 열광적 환호를 보냈다. 결국 허 후보는 노 후보를 제치고 부산 북강서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2년 제16대 대선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균형발전을 3대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민주주의, 균형발전, 동북아시대라는 국정과제 중 균형발전을 민주주의 다음으로 추진해야 할 중요한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이후 충남 연기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일대에 국내 중앙 정부·행정기관을 이관할 도시를 짓기 시작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공정거래위원회, 소방청, 기획재정부 등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국내 주요 정부기관이 순차적으로 이전했고 이 일대는 현재 서울과 광역·특례시를 제외한 지방 도시 중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됐다.
노무현 정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만들어 지방 분권 시대를 가속화하려 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며 없었던 일이 됐다. 관습헌법상 위헌이고 이를 실행하려면 국회의원 재적 의원 중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고 국민투표서 과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지역 공항 역사도 빼먹을 수 없다. 공항은 지금도 수많은 지역민들이 가장 원하는 경제 인프라 중 하나다.
일단 건설되면 공항을 통해 들어온 관광객이 지역을 여행하며 돈을 쓰고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면 갖고 있는 부동산 가격도 올라가게 돼 지역민들로선 엄청난 경제적 기회를 가질 수 있다.
2024년 10월 현재 국내에 건립 추진 중인 공항만도 2곳에 달한다. 대구경북신공항과 가덕도 신공항이 그것이다. 관련 자치단체장들은 지역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틈틈이 국회와 정부 고위당국자를 만나 신공항 추진에 대한 의견과 동의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엔 7개의 국내공항이 있다. 이들 중 실질적으로 이윤을 내며 정상 운영되는 공항은 3곳에 불과하다. 김해공항과 제주공항, 김포공항이다. 다른 공항들은 사실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공항 관계자들 사이에선 웃픈 농담으로 ‘김해, 제주, 김포가 다른 공항 다 먹여살린다’는 말이 오고 갈 정도다. 이 좁디좁은 땅덩어리에 공항을 7곳이나 짓고 적자를 낸 데에도 지역균형발전이 한몫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지역 표를 얻기 위해 ‘지역균형발전’이란 논리로 공항을 건설하겠단 공약을 남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경남 밀양에 신공항을 짓겠다 약속했다. 김해공항 이용객이 점점 늘며 이를 분산시키기 위한 제2공항을 건설해야 한단 명분도 제시했다. 그러나 경남 밀양 신공항 부지에 공항을 건설하려면 일대 산을 깎고 인근서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간 주민들이 타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단 비판이 제기됐다.
투입 대비 경제적 효과를 산출하는 BC 점수서도 1을 넘지 못했다. 투입한 만큼 본전을 뽑지 못할 거란 얘기다.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은 본인 입으로 내뱉은 ‘경남 밀양 신공항 건설’을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머리를 숙였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역균형발전 역사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픈 게 있다. 정말 근본적인 질문이다.
‘진정으로 지방민들은 지역균형발전을 원하는 걸까.’
더 깊이 들어가보자.
‘진정으로 지방민들은 중앙정부에 파이를 나눠주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준비는 됐나’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은 국회를 방문한 자리서 대구경북지역 국민의힘 의원과 고성과 설전을 벌였다. 대구경북통합신공항 민간공항 내 복수 화물터미널을 어디로 지을지를 놓고 감정섞인 발언을 주고받았다. 홍 시장은 한 대구경북 의원의 감정 섞인 말에 “가져가라”며 빈정상한단 태도를 보였다.
2022년 12월엔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대구 달서구 옛 두류정수장 터에 짓기로 한 대구신청사 건립을 놓고 홍 시장과 대구시의회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홍 시장은 대구시의회가 전액 삭감한 390억 원은 신청사 유보금으로 남아있던 거라며 대구시의회가 예산을 삭감한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단 반응을 보였다.
한 취재진이 ‘대구시의원들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자 설마 생각 없이 장난으로 예산을 짰겠냐는 반응도 내비쳤다.
김해신공항 선정 과정을 보면 이런 질문이 왜 나왔는지를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김해신공항 계획 검증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경제성’이 아닌 ‘법률 해석’이었다.
공항시설법 제34조엔 공항 인근에 일정 높이 이상 장애물을 설치하거나 방치해선 안된다는 규정이 있다.
김해신공항 계획에 따라 설치될 예정이었던 활주로 인근엔 3개의 산이 있는데 이를 제거하려면 관계 행정기관 장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 부산광역시장과 협의를 거쳐야 한단 것이다.
문제는 부산시가 김해신공항 건립을 반대한단 것이다. 김해신공항에 지을 인프라를 부산 가덕도에 지어야 한단 논리를 펼쳤다. 자연스레 김해신공항 건립을 위한 허가도 내주지 않았다.
지역균형발전 취지는 수도권에 몰린 인구와 경제 인프라를 지방에도 나눠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자기 지역만 잘 살면 된단 ‘이기심’이 개입된 순간 지역균형발전 취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더군다나 수도권서 이미 많은 기반시설과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이 이를 포기하고 지방으로 내려오게 하기 위해선 그만한, 아니 그보다 더 큰 보상안을 제시해야 한다.
지방이 보상안을 제시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론 중앙정부에 기대게 된다.
그런데 중앙정부가 호락호락한 사람들인가. 서울과 수도권에 이미 얼마나 많은 기득권을 갖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그들이 단지 ‘수도권 과밀화 해소·지역균형발전’이란 명분만으로 본인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과 파이를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여기에 ‘우리 지역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마저 보이면 그들이 과연 순순히 파이를 줄 수 있을까.
지방이 원팀으로 뭉쳐 중앙정부에 확실한 명분과 근거를 내세워 파이를 달라 해도 모자랄 판에 이기심으로 뿔뿔이 흩어져 제 목소리만 낸다면 균형발전이 이뤄질 수 있나.
얼마 전 외할머니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한 지방에 있는 장례식장서 하루를 묵었다. 조문객을 받고 잠시 쉬며 아버지와 길을 걷던 중 인도에 빼곡이 주차된 트럭과 차량들을 보게 됐다.
차량이 없는 인도엔 잡초와 쓰레기가 무성했고 벽돌과 콘크리트 곳곳이 파여 있었다. 자연스레 ‘이 지역 공무원들은 도대체 뭘 하는건가’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균형발전이란 명분을 내세우고 싶으면 제발 본인들 이기심부터 버리길 바란다. 더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는다. 내 명분만 내세울 순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