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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현 Oct 19. 2024

민주화 역사를 함께한 명동성당

크리스마스가 70일도 남지 않은 지금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전에 갔다와야 겠단 생각으로 명동성당을 갔다.


코로나19 엔데믹(풍토병화)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의무가 사라진 후 명동성당 일대 거리는 상인과 관광객으로 붐볐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주말에도 텅텅 비었던 거리는 서울서 가장 활기찬 거리가 됐다.



명동역서 명동성당까지 가는 데 30분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크리스마스 대목 땐 얼마나 더 붐빌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인파를 헤집고 피하며 도착한 명동성당엔 흑인, 백인뿐만 아니라 아랍권 사람들도 보였다. 히잡을 쓴 여인도 붐비는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당을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냉정한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민주화와 양심을 외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데 앞장선 명동성당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10여 명 안팎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의자 사이를 지나 중앙에 다다르자 TV서 보던 십자가가 놓인 공간이 보였다. 본인을 바보라 칭했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섰던 그 자리를 보면 경건하단 생각과 함께 한 역사적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제15대 대선 당선 후 축하 기념 미사에 상대 후보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초청해 선거 과정서 생긴 앙금을 털어낸 일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제가 쉽게 이회창 선생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해 보니까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논리에 허점이 없어 상대하며 혼났다. 우리 이회창 선생 앞날에도 큰 영광이 있길 바라며 (회중) 여러분이 좋으시다면 이회창 선생께 박수 한 번 보내드리겠다”고 발언했다.


맨 앞좌석에 앉았던 이회창 후보는 몸을 틀어 90도로 숙여 인사했고 회중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여러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며 출범 정부에 아낌없는 지원과 격려를 부탁했다.


두 사람은 중앙에 선 김수환 추기경과 손을 맞잡으며 기념사진을 촬영했고 회중은 이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축하 기념 미사 건만 봐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명동성당은 우리나라 평화와 민주화, 사회공정, 인권을 위해 헌신한 역사적 장소다.


대표적 사례가 1976년 3월 1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가 박정희 정부의 긴급조치 철폐와 민주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 자유와 의회정치 회복,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한 3·1 민주구국선언이다.


선언문에 서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법원 최종 판결서 5년형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가족과 면회도 한 달 한 번 20분밖에 할 수 없었다. 면회를 제외하곤 편지밖에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한 장 남짓한 편지에 담고 싶은 말을 적어야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잣대를 대며 최대한 작은 크기로 글씨를 썼다.


옥중서신으로 잘 알려진 편지엔 한 장에 1만 자가 넘게 기록된 것도 있었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적힌 독서목록도 적어 자식에 전했을 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옥중서신을 진심을 다해 썼다.


10·26 사태 후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 석방이 단행되며 풀려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부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조종했단 의혹으로 군사재판서 사형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수감됐다.


하루하루 죽음의 고비와 맞닥뜨리며 두려움·공포와 맞서야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독서에 전념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독서에 전념했다. 독서 책을 넣어줬던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 독서 모습을 자서전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지금껏 남편만큼 진지하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독서와 사색, 신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감옥은 그(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혼을 단련하고 살찌운 진정한 대학이었다.’


[출처=동행]


사형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에게 ‘이제 죽음의 공포서 벗어났으니 신학보단 역사와 철학, 국방분야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관련 책들을 넣어 달라 부탁했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못말리는 독서광’이다. 대통령 재임 시절 국민과 소통하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자리선 ‘진짜 좋은 책이 있는데 읽을 시간이 없으니까 속으로 ‘감옥 한 번 더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발언해 좌중을 놀라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 인사들이 명동성당을 거쳐 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전투경찰에 포위 당한 시위대가 최후 결전지로 모인 곳도 명동성당이다.


항쟁이 격했을 땐 성당 일대로의 물품 반입이 일체 금지됐다. 물과 음식도 반입이 금지됐다. 굶으며 집회를 이어간 시위대를 본 개성여고 여학생들은 본인이 먹을 도시락을 시위대에 제공했다. 당시 개성여고는 명동성당 바로 옆에 있었다.


1987년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 인사들에 대한 석방이 단행되며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거듭난다.


굵직한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 한 명동성당은 이제 정치적 성격보단 본래 목적인 종교적 역할을 더 많이 수행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이듬해 가정과 국가의 번영을 기도하는 ‘진정한 종교적 목적의 성당’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를 좀 더 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명동성당이 ‘종교적 목적의 성당’으로 변모하는 것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1980년대 만큼 심각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협하는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분명 좋아지고 있다. 경제력도 세계 10위권에 들어섰고 민주화 지수도 20위권에 들어왔다.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은 2011년 '안철수와 박경철'이란 프로에 출연해 우리나라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떡볶이 노점상을 운영하며 '미래 힘 안들고 사는 방안'을 고민하는 아주머니 바로 앞에서였다.


'우리가 개발도상국일때 저 앞에 점처럼 보인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뛰었다. 옆을 볼 여유가 없었다. 반칙을 해도 '우리가 남이가'라며 뒷돈 주며 넘어갔다. 이젠 다 따라잡았다 생각한다. G20인데 뭘 더 따라잡냐. 이젠 옆을 봐야 한다. 그런걸 논의할 시기가 됐다. 바로 앞에 계신 아주머니께서도 풍요까진 아니지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성실하게 살아오셨다면 적어도 노후에 먹고살 걱정은 없이 살아야 하지 않나. 우리가 다 같이 미안해야 할 일이다.'


박경철 교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옆을 봐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조금 천천히 나아가더라도 사회 구성원들이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 방안 중 하나가 바로 견제와 균형이다.


2024년 12월 25일. 올해 크리스마스 명동성당을 방문한 이들은 1960~80년대 성당을 방문해 기도한 이들보다 덜 심각한 고민을 갖고 있길,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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