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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첫 여행

리버풀 1

by Han Karl

1.

두 아들의 하프텀Half Term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3학기제다. 9월 학기를 시작으로 1월과 4월에 새로운 학기가 시작한다. 학기가 끝나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사이 기간이 방학이다. 그리고 매 학기 중간마다 주어지는 1주 간의 짧은 방학을 하프 텀이라고 한다. 영국의 아이들을 해마다 3번의 방학과 3번의 하프 텀을 즐긴다.


준하와 준서는 9월부터 영국의 공립학교 Badger Hill Primary School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 15분까지 수업이다. 변변하지 못한 영어 실력으로 영국 아이들 속에서 영국 선생님과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첫째인 준하는 좀 나은 편이다. 그나마 원어민 학원을 한국에서 조금은 경험했었다. 반면 둘째 준서는 영어에 관한 한 순백에 가까웠다. 알파벳 정도만 겨우 아는 실력으로 그 상황에 던져졌다. 하루 종일 있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준서였다. 유쾌 발랄 명랑하던 준서의 말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한 달, 두 달 그리고 첫 학기를 보내는 시간 동안 준서의 영어 습득력은 놀라웠다. 지금은 40~50% 정도는 선생님 말을 알아듣는다며 웃는다. 놀라운 학습능력이라는 반가움 이면에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겪었을 생존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의 그늘 때문에 대견하면서도 한편 안쓰럽다. 준하준서 모두 안간힘을 써가며 영국에서의 첫 학기를 견딘 것이다.


아내와 나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는 뻔한 일들이 요크York에서는 모두 도전이었다. 집을 구하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전화와 인터넷을 연결하고, 전기와 수도를 신청하는 모든 일상이 사건과 사고였다. 하루는 영국의 멍청한 행정서비스를 헐뜯었고, 다음날은 영국 사람들의 대책 없는 느긋함을 비난했었다. 일례로 인터넷 연결에 한 달이 걸렸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마치 애초부터 영국이라는 나라에는 서비스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 같다. 영국에서 뭔가를 하려면 뭔가를 하려는 사람 스스로 시간과 노력과 인내를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영국에서 한국의 상식을 적용하려 했던 것 자체가 바보 같고 한심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영국에서의 첫 학기는 준하도 준서도 아내도 나도 영국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초인적인 힘으로 건설해 나간 시간이었다. 따라서 처음 맞는 하프텀은 잠깐 숨을 고르며 재충전하기에 더없이 좋은 작전타임 같은 시간이다. 하프텀의 첫날, 11월의 첫날, 우리는 리버풀로 떠나기로 했다.


리버풀은 요크에서 100마일 남짓 떨어져 있다. 영국을 동서로 가르는 M62 고속도로를 타고 아일랜드 해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영국에서의 첫 장거리 여행이라는 부담감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요크에서 가까운 리즈Leeds 근교에서 고속도로에 차를 올린다. 영국의 고속도로는 최악이다. 도로면은 거칠고, 이정표는 친절하지 않다. 영국의 신사들은 시내 주행만 하는지 고속도로 위의 영국인들은 모두 터프가이다. 더욱이 속도 제한은 있지만 단속 카메라는 거의 없는 영국의 고속도로는 거친 아우토반 같다. 맨체스터를 지나 20분쯤 더 달리자 리버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발견한다. 통행료가 없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고속도로에서의 고생에 대한 보상 같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리버풀에 들어서자마자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다. 8차선 도로를 역주행해버린 것이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영국에서의 우회전은 교차로에서 크게 회전해야 한다. 순간 깜빡하고 가까운 쪽으로 들어섰다가 일단의 자동차들과 맞서고 만 것이다. 웬만해선 경적을 울리지 않는 영국 사람들이 일제히 클락션을 눌러 댄다. 잽싸게 골목으로 차를 밀어 넣는다. 아내와 아이들도 놀랐는지 말이 없다. 창을 열어 차 안의 어색한 공기를 환기시킨다. 좀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골목을 나와 첫 목적지인 알버트 도크 Albert Dock로 차를 몬다.


1. Albert Dock.jpg Albert Dock


알버트 도크는 200여 년 전 리버풀의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곳이다.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 시절의 리버풀은 런던과 글라스고 다음으로 부유한 도시였다. 도로는 황금으로 포장되었고 사람들의 재산은 계속 늘어나서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는 리버풀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리버풀은 전 세계 무역의 40%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알버트 도크가 있었다. 바다 내음이 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걸으며 좀 전의 아찔했던 기억을 털어낸다. 축구장 몇 개를 모아놓은 크기의 도크에 다양한 형태의 배들이 정박해 있다. 알버트 도크 주변에는 23만 5천 개의 붉은 벽돌로 지은 오층짜리 창고 건물 다섯 채가 도크를 에워싸며 숲을 이루고 있다. 당시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덕분에 19세기 알버트 도크의 풍경을 손쉽게 상상해 본다. 전 세계로 해상 무역을 펼치던 배들은 저기 하틀리 다리Hartley’s Bridge를 통과해 도크를 드나들었을 것이다. 정박한 배 주변으로 수백 명의 항만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인도에서 온 묵직한 향신료 자루들이 산처럼 포개지고, 남미의 구리 같은 자원들은 정해진 용처를 찾아 바쁘게 옮겨진다. 항해를 마친 뱃사람들은 잠깐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고풍스런 회랑을 지나 펍으로 향하고, 다른 항만 노동자들은 새로운 상품으로 텅 빈 배를 다시 채우느라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당시의 무역품들이 이곳 알버트 도크로 들어와 유용한 것으로 재가공되어 다시 리버풀을 빠져나갔다. 거기에는 노예도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들이 주요 수요처인 미국과 중남미로 팔려나갔고, 그곳의 면화와 설탕, 광물 자원들로 교환되어 돌아왔다.


현재에서 과거로의 시간 여행 기능을 가진 알버트 도크는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도크의 물을 빼내고 주차장을 만들자는 멍청한 계획이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세워졌었다고 한다.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19세기 도크 건축물이 주차장이 될 뻔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문제는 경제였다. 정확히 한 세기 전만 해도 리버풀은 도시의 미래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했었다. 리버풀을 떠받치던 산업 구조가 무너지고 무역량이 줄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실존의 문제는 이성을 휘청이게 하는 법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계의 보물을 하마터면 역사책에서나 보게 될 뻔했다. 알버트 도크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밀레니엄을 전후해서다. 외부의 빅토리아 시대 모습은 그대로 두고, 내부는 다양한 용도로 리모델링되었다. 비틀즈스토리, TATE 리버풀,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 노예박물관 등 박물관 집합소라 불릴 만큼 많은 박물관들이 붉은 벽돌 건물에 입주했다. 회랑을 가진 1층은 각종 카페와 식당, 펍들로 채워졌다. 창고로 쓰이던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에 현대의 문화적 콘텐츠들이 채워진 것이다. 이제 알버트 도크는 과거의 위대한 무역 도시, 리버풀을 상징하던 장소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 리버풀의 상징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검소하고 소박하며 다소 투박하기까지 한 빅토리아 풍의 건축물 속을 천천히 걷는다. 주차장 이야기에 애정과 애착이 더 간다.


도크에 정박한 배들을 기웃거린다. 머지사이드 해양박물관 앞에 있는 집채 만한 닻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노예박물관에선 르네상스를 머리로 배운 서양 문명의 잔인함을 생각한다. 사람을 물건으로 판 놈이나 산 놈이나 다 나쁘다. 하틀리 다리를 배경으로 도크의 전경을 담은 가족사진을 찍는다. 아내와 아이들 머리 위로 TATE 간판을 본다. 붉은 고색창연한 벽돌에 촌스런 폰트의 알파벳이 박혀 있다. 아트를 논하는 곳을 가리키는 폰트 치고는 성의 없는 폰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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