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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에버튼

by Han Karl

5.

축구의 도시, 리버풀까지 와서 프리미어리그 관람을 빠뜨릴 순 없다. 이것은 리버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의 여행 일정에 맞는 리버풀 경기를 예매하려 했었다. 그런데 리버풀 경기는 없고 에버튼 경기가 있었다. 에버튼의 상대팀은 스완지시티였다. 한국에서는 한때 기성용이 팀을 먹여 살린다고 해서 기완지시티로도 불렸던 웨일스의 팀이다. 홈석은 이미 매진이었다. 바쁘게 스완지시티 회원에 가입하고 원정팬들을 위한 원정석을 구입했다. 리버풀이 시라면 에버튼은 구 정도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사실 에버튼이 리버풀의 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예매를 하며 처음 알고 깜짝 놀랐었다. 리버풀FC의 안필드Anfield와 에버튼FC의 구디슨 파크Goodison Park 구장은 채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에버튼과 스완지시티의 경기가 2시간 남짓 남았다. 서둘러 안필드에서 구디슨 파크로 향한다. 구디슨 파크 주변은 이미 팬들에 점령당했다. 사람과 차가 뒤엉켜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1킬로미터 거리를 20분 넘게 차로 이동 중이다. 주변 주차장들은 이미 만석을 선언하는 푯말을 걸어 두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차장 관리 아저씨에게 구원의 제스처를 취한다. 목에 문신을 두른 아저씨가 우리의 제스처에 반응한다. 아이 둘을 태운 동양인 부부가 못내 안쓰러웠던지 어렵게 공간 하나를 만들어 준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연신 감사의 인사를 한다. 혹시나 우리가 에버튼이 아닌 스완지시티를 응원하러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저씨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주차장을 벗어난다. 거리는 이미 에버튼의 유니폼과 스카프, 모자로 무장한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점령당해 있다. 구디슨 파크로 오르는 길의 분위기가 위압적이다. 깔끔한 동네인 요크에 사는 사람의 눈에 에버튼은 거친 동네다. Royal Oak라는 이름의 펍은 2층까지 사람들을 가득 채웠다. 안에서 밀려난 더 많은 사람들이 펍 바깥까지 맥주를 들고 나와 있다. 준하준서의 손을 꼭 잡고 마치 경보하듯 빠른 걸음으로 오르막을 오른다. 재개발 지역 같은 동네의 끝에 경기장 입구가 보인다.


5. Goodison Park.jpg Goodison Park


구디슨 파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장이다. 1892년에 지어졌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보다도 서른세 살이나 많다. 1960년대 최고의 미드필드 3인방으로 불린 볼James Ball과 하비Colin Harvey, 켄달Howard Kendall의 선수 시절 사진이 경기장 벽에 걸려 있다. 사진 아래에 적힌 THE HOLY TRINITY라는 그들의 애칭은 좀 과해 보인다. 경기장 입구에 있는 푸드트럭에서 먹거리들을 장만한다. 점심을 건너뛴 탓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한 사람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 좌석을 찾는다. 프리미어리그 경기의 첫 직관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사이드라인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장은 우리에게 몇 가지 놀라움을 선사한다. 의자와 바닥이 무려 나무다. 좌석은 너무 촘촘하다. 경기장과 관중석은 거의 붙어 있다. 몸을 내밀면 스로인하는 선수의 팬츠를 만질 수 있을 정도다. 에버튼과 스완지시티 선수들이 푸른 잔디 위에서 몸을 풀고 있다. 탐나는 하드웨어를 탑재한 선수들의 놀라운 기교를 바로 눈앞에서 보는 즐거움이 경기를 보는 것 못지않다. 평소 축구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아내도 색다른 경험이 즐거운 모양이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념하는 식전 행사를 엄숙히 치르고 곧바로 경기가 시작한다.


홈팬들은 경기 흐름에 따라 환호와 탄식을 번갈아 내뱉는다. 하지만 원정팬들은 줄곧 환호만 지른다. 앉아서 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경기 내내 열정적이다. 에버튼에서 스완지시티는 30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다. 웨일스의 열악한 도로 사정을 고려하면 편도로만 4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이렇게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이들의 열정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전반 휴식 시간에 음료를 사러 가던 나와 준하를 발견한 스완지시티 팬들이 일제히 ‘기’을 연호한다. 그들에 떠밀려 우리는 졸지에 이산가족이 될 뻔했다. 아직도 한국인들을 보면 ‘기’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전반 내내 홈팬과 원정팬이 맞닿은 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었다. 후반 시작과 함께 급기야 사고가 났다. 원정팬들의 도발에 발끈한 홈팬 몇몇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곧바로 한 무리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흥분한 홈팬들을 데리고 경기장을 나가 버린다. 영국축구협회 규정에 따르면 저렇게 끌려나간 팬들은 평생 축구장 출입이 제한된다.


경기는 0대 0으로 끝이 났다. 골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지만 전후반 내내 쉼 없이 격돌하던 선수들의 스펙터클만으로도 첫 프리미어리그 직관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경기가 끝난 경기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댄다. 나중에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그런데 폴리스 라인을 지키고 서있던 중년의 경찰관이 준하준서를 데리고 경기장까지 내려가더니 사진을 찍게 해 준다. 덕분에 구디스파크에서의 멋진 기념사진과 함께 평생 기억될 멋진 경험을 선물 받는다. 배려심 많은 경찰 아저씨와의 사진 촬영도 잊지 않는다. 폴리스 라인을 넘는 다른 청년들을 단호하게 제지하는 아저씨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시간은 오후 5시를 넘고 있다. 서머타임이 해제된 11월의 영국에서 오후 5시는 한밤중이다. 그럼에도 거리의 빛은 너무 약하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구디슨 파크를 내려가는 길은 아까보다 더 험악해져 있다. ROYAL OAK는 경기 전보다도 더 큰 업장이 되어 있다. 스완지시티가 이기지 않은 것이, 에버튼이 패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둠이 앉은 거친 동네를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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