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이름. '저작권'
오래전에 본 할리우드 영화 중 하나는 ‘복제(클론)’을 주제로 한 영화였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생명까지 복제해 내는 그 세계관은 어린 나에게 묘한 불안감을 주었다. 최근에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 역시 복제 인간을 다룬 작품이라 들었다. 기술은 계속 진보하고 있고, 우리는 점점 ‘진짜 나’와 ‘복제된 무엇’ 사이의 경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사회 곳곳에서는 누군가의 얼굴이 무단 도용되어 불법 영상에 사용되는 일이 벌어지고, AI 기술로 가짜 뉴스와 이미지가 양산되며, 저작권과 초상권에 대한 논쟁이 연일 뜨겁다. 나는 그런 사회 속에서 ‘저작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과연 저작권은 어디까지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내 얼굴, 내 목소리, 내가 쓴 글, 내가 떠올린 아이디어들... 이 모든 ‘내 것들’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나는 보건소 소속의 금연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 업무는 공공장소에서의 불법 흡연을 계도하고 단속하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흡연 장면을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 증거를 촬영하는 일이 있는데, 이때 가장 많이 듣는 항의가 “초상권 침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공공장소에서의 단속은 관련 법령에 의해 정당하게 수행되지만, 이 과정에서 마주치는 ‘권리’ 간 충돌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초상권은 타인의 얼굴을 무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권리이고, 내 생각의 저작권이란 창작한 작품에 대한 권리, 즉 내 이름표이다. 둘 다 ‘내 것’에 대한 보호라는 점에서 닮았지만, 적용 범위나 법적 기준은 다르다. 이처럼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내 권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남의 권리는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나에게 있어서도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친구와의 캠핑에서 벌어진 기억이다. 야외의 맑은 공기, 한낮의 햇살을 느끼며 가볍게 마신 술에 우스꽝스럽게 잠든 나의 얼굴을 친구가 영상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고, 친구는 자신의 SNS 조회 수를 위해 그 영상을 허락 없이 게시했다. 친구에게 악의는 없었겠지만, 나는 충분히 당황스러웠고 기분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이 또한 내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가 사용된 경험이 아니었을까.
요즘은 AI 작곡 사이트를 통해 누구나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다. 나도 가사 몇 줄을 넣고 음악을 만들어봤다. 신기하기도 했고 재미있었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과연 내 창작물일까?” AI가 멜로디를 생성했고, 나는 단지 몇 가지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처럼 저작권은 단순히 법적 권리 이상이다. 그 안에는 창작에 대한 존중, 인간의 개성과 노력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말하지만, 모방이 진짜 창조를 짓밟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 말은 더 이상 아름다운 격언이 아닐 것이다.
저작권은 흥행하거나 유명한 작품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작고 평범한 나의 이야기 하나라도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내 것’이라 불리는 수많은 것들을 잃고 살아간다. 가족, 관계, 공간, 표현... 그중에서도 생각과 표현이라는 무형의 자산은 그 누구도 쉽게 빼앗을 수 없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저작권이란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울타리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복제 인간이 실현될 수도 있고, 기술은 더 정교해지겠지만, 적어도 창작자의 이름만큼은 복제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