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보내는 방식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비슷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2–30대 무렵의 연말은 늘 주변에 사람으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북적이는 식당에 모여 한 해를 정리했다.
좋았던 일은 웃음으로, 슬펐던 일은 술잔에 묻어
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해가 저물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한해를 잘 보내주는 것만 같았다. 마치 수학의 공식처럼.
그땐 연말이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조용한 시간이 어색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연말은 사람이 있어도, 사람이 없어도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해명하거나 변명하고 싶지도 않은 날들이 늘었다.
짜증을 낼 힘도, 화를 낼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날.
그저 머리를 비우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은 날들이다.
가정을 꾸린 지 17년.
시간은 충분히 흘렀고, 관계는 무르익어야 할 것 같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와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벽 하나가 생긴 듯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또 다툴까 불안해 "오늘은 어땠어? 올해는 어땠어?"라는 말 한마디를 꺼내지 못한 채
서로의 하루를 스쳐 보내고 있다.
중학생이 된 딸아이는 밝다.
친구들과의 시간이 세상의 전부인 듯 해맑다.
그 모습이 고맙고 사랑스럽지만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는 나는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그림자가 된듯하다.
문득문득 쓸쓸함이 밀려온다.
한때는 오랜 시간 동안 엄마, 아버지의 아들로서, 누나들의 막냇동생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몸도, 마음도 가까이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지금은 기억 속 풍경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누군가에게 내 한 해를 평가받고 싶은 것도 아니고
잘 정리된 회고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옆에 어떤 누군가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아무 목적 없는 시간이 그립다.
이렇게 한 해의 끝에 서서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올 한 해를 잘 살아온 걸까.
내 주변으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눈에 띄는 변화도 없고 내년의 일상 역시 크게 달라질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너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는 것, 관계의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많은 에너지를 써온 한 해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쓸쓸함은 공허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올해를 특별하게 마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웃으며 보내지 않아도, 의미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아도.
그저 이렇게 한 해의 끝에 서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분명 이 시간을 잘 보내주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답을 내리는 날이 아니라 그저 멍하니 서있어 보는 날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이 연말은 충분하다.
<안녕히 2025.>
이번글을 끝으로 올해의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려오신
브런치스토리 작가님들께 수고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2026년에 또 힘차게 달려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