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퇴임 후 일기: 김밥의 선물

오이 맛은 상상으로, 행복은 진심으로

by 바래

퇴직하고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이제 겨우 2주, 누군가에겐 짧은 휴식이겠지만 38년을 쉼 없이 달려온 저에게는 나를 찾아가는 소중한 첫걸음의 시간입니다. 밀린 교단 일기를 정리하고, 책을 읽고, 집안 살림을 돌보는 소소한 일상. 그 담백한 하루하루가 제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최근에는 제가 활동하는 종교 합창단 단원을 위해 김밥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손은 조금 느려도, 이제 저에게는 '내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자유가 있기에 며칠에 걸쳐 정성을 들였습니다. 하루는 흙 묻은 우엉을 다듬어 매콤달콤 짭조름하게 졸이고, 하루는 당근을 볶고 오이를 절이며 그분들이 맛있게 드실 모습을 상상했지요.

드디어 결전의 금요일, 아침 8시부터 도마 앞에 서서 본격적으로 김밥을 말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매운 어묵 김밥부터 꼼꼼히 싸서 썰어보니, 깻잎의 선명한 초록색이 단면에서 빛을 발하더군요. 묘하게도 그 초록색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지만, 재료를 아무리 살펴봐도 빠진 것이 없어 "다 됐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문득 젊은 시절 보았던 시트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김밥 백 줄을 다 싸고 보니 재료 하나가 남아서 그걸 다시 다 풀어 쌌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죠. "에이,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다시 풀어?"라며 코웃음을 쳤던 기억을 뒤로하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40줄의 대장정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방을 말끔히 치우고 홀가분하게 뒤를 돌아본 순간, 김치냉장고가 보였고 야채칸을 열었을 때 어제 정성껏 절여두었던 초록빛 오이가 저를 비웃듯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시트콤 속 주인공을 비웃던 제가, 정확히 그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40줄을 다시 푸는 대신, 은퇴 후의 여유라는 양념을 김밥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합창단 분들께 김밥을 내어드리며 유쾌하게 고백했지요.

"여러분, 오늘 김밥에는 오이가 빠졌습니다. 대신 제가 어제 정성껏 오이를 절여두었으니, 드시는 동안 머릿속으로 아삭한 오이 맛을 상상하며 더해서 드셔주세요!"

제 장난 섞인 고백에 연습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부족함은 오히려 대화의 꽃이 되었고, 단원들은 "상상하며 먹으니 진짜 오이 향이 나는 것 같다"며 정성을 더 깊게 알아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과 함께 남은 김밥 위에 절인 오이를 얹어 먹으며 또 한바탕 웃었습니다. 다음 날 점심에는 그 오이를 듬뿍 넣어 참치김밥을 쌌더니, 참치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아삭함이 일품이더군요. 남은 오이는 오이 김치로 변신해 우리 집 식탁의 든든한 반찬이 되었습니다.


김밥 속에 들어가지 못한 오이가 참치김밥의 주인공이 되고 아삭한 김치가 되듯, 우리 삶도 박자가 조금 어긋난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완벽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이며, 실수마저 웃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여유야말로 인생의 가장 맛있는 재료라는 것을 이 40줄의 김밥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이는 비록 주방에 남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제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 향기로운 김밥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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