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 한가운데에서
오키나와는 태풍이 올라오는 길목에 있다. 6월 즈음부터 태풍 이야기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고, 10월까지도 드물지 않게 태풍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여행객의 입장에서 모처럼의 여행 날 태풍이 온다면 그것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오키나와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대부분의 태풍은 비바람이 좀 더 많이 부는 날 정도로 느껴졌다. 아, 조금 더 신경 써야 하는 면이 있다면 이런 날은 차 문을 열 때 문을 끝까지 잡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차 같은 조그만 차 문은 우습게 뒤로 꺾어버릴 것만 같은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태풍이 제법 크다고 예상되는 날에는 안전을 위해 등교를 제한하기 때문에 사실상 휴일인데, 누구의 장난인지 태풍은 약속한 듯 주말에만 왔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 특혜(?)를 누리지는 못했다.
오키나와에 살면서 태풍이 온다는 뉴스를 들으면 처음에는 생수와 빵을 조금 더 사다 놓았지만 다행히 별 일 없이 지나가기 일쑤였다. 한 번은 나하 시에 사는 한 친구에게 태풍이 올 때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의외로 그 친구의 대답은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태풍이 와서 문제가 생겨도 하루 만에 복구되기 때문이라고. 오키나와인의 자신만만한 얘기를 듣고, '오키나와는 태풍이 자주 오니까 피해가 생겨도 복구작업이 빠르구나' 하며 마음을 놓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무려 나하 시(市)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신감이 나왔던 것 같다. 우리가 사는 곳은 요미탄 손(村, 일본 행정구역), 농담 반 진담 반 시골이라 함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었나 보다.
9월 초 한국에 잠시 귀국 일정을 앞두고 있을 때 태풍 짜미(Trami)의 소식이 들렸다. 이전 태풍들과는 다르게 며칠 전부터 뉴스가 매우 요란스러웠다. 무려 5등급의 슈퍼 태풍인 짜미가 오키나와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지나간다는 소식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연신 태풍 상륙이 예상되는 날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강조했다. 바다의 경우 10m 정도의 파도가 예상된다고 하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위해 10m 파도가 아무리 궁금해도 나오지 말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오히려 더 궁금증이 자극되어 베란다 창으로 파도를 구경해보고 싶은 기대가 올라왔다.
태풍을 대비해 와인과 치즈를 준비했다.
우리도 이번엔 뭔가 더 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마트에 갔다. 이미 물, 빵 등은 대부분 다 팔려있었다. 남은 물을 몇 개 집어 들고, 빵이나 초 대신 야심차게 맥주와 와인과 치즈를 잔뜩 사두었다! 모아놓고 보니 정말 재난 물품이라고는 라디오 겸 스피커와 손전등뿐이었지만, 어차피 태풍이 와서 밖에도 못 나가니 집에서 하루 정도 술이나 마시고 영화나 보자는 태평한 심산이었다. 만에 하나 단수될 경우를 대비해서 욕조에 물을 받으면서도, 그 마음은 걱정보다는 '에이 설마'하는 농담에 가까웠다.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겪은 적 없던 덕에 생긴 건방진 패기였으리라.
태풍 당일이 되어 아침을 먹고 나니 비바람이 꽤나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베란다 창문이 덜덜 떨리며 무서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깜빡'하고 전기가 끊겼다. 앗차 하는 사이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오~ 이번엔 정말 센 태풍인가 봐! 깜짝 놀랐네"하며 추가적인 정전에 대비해 서둘러 노트북과 휴대폰을 모두 충전시키기 시작했다. 두 어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니 아예 전기가 나가버렸고, 수도까지 한 번에 끊겨버렸다. 전 날 먹을 거라고는 과자밖에 안 사놓았지만, 다행히 가스레인지는 작동했기 때문에 냉장고에 쟁여두었던 음식들로 하루는 너끈히 버틸 수 있었다.
한낮이지만 밖은 회색으로 캄캄했다. 창 밖을 내다보니 동네는 어둡고 저 멀리 나하 시 즈음에서 오는 불빛만 보일 뿐이었다. 매서운 바람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더니 이내 창문에 소금기가 어려 바깥도 잘 보이지 않았다. 와이파이도 되지 않아 결국 가장 고전적인 방법인 라디오를 통해 미군방송으로 태풍 소식을 업데이트했다. 정오가 지나고나니, 라디오를
통해 우리 지역이 태풍의 눈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신기하게도 밖이 제법 환해지고 비도 바람도 그쳐있었다. 말로만 듣던 태풍의 눈 안에 우리가 들어와 있다니! 벌써 각자의 마당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조심스레 베란다 문을 열고 꿉꿉한 집안에서 나와 태풍의 흔적을 둘러보았다. 큰 나무들도 더러 부러져있기도 했지만, 전봇대가 넘어진다거나 하는 등 더 큰 사고로 이어질만한 일은 다행히 없어 보였다. 자그마한 우리 차가 행여 바람에 날아가지 않았을까도 확인했는데, 아마 그럴 리 없겠지만, 기분 탓인지 주차했던 자리에서 5cm 정도 옆으로 밀려난 것만 같았다. 마치 그대로 태풍이 사라진 것만 같은 신기한 날씨였지만, 익히 알던 대로 태풍의 눈을 벗어나며 곧 다시 비바람이 시작되었다. 전기가 오늘 내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접어둔 채, 우리는 준비해둔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며 어두컴컴한 집에 적응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맞춰 준비했던 공포영화를 한 편을 보고 잠에 들었으니, 우리의 태풍 준비는 미흡했던 것 치고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태풍이 휩쓸고 간 다음 날, 우리는 전날 지연된 비행기를 타러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금방 정리가 될 것이라던 나하 친구의 말과는 달리 태풍이 오키나와를 거의 다 빠져나간 아침에도 전기와 물은 나오질 않았다. 욕조에 받아놓은 물을 떠 샤워를 하며 (과장이지만) 난데없이 이재민이 되었다며 서로를 보며 웃었다. 다행히 버스는 정시에 운행해서 공항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니 태풍의 피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커다란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넘어져있고, 자동차 매장 지붕도 완전히 무너져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우리 집 앞 주민센터 대문의 지붕도 이 태풍으로 반쯤은 날아가 있었는데, 6개월 뒤 우리가 떠나는 그날까지 새로 지붕을 올리지는 않았더라. 역시 느긋한 오키나와다. 재밌었던 것은 태풍 바로 다음 날 아침 난리통에 편의점들은 닫혀있는 반면 종종 보이는 라멘집들은 대부분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태풍 불 때는 라멘인가? 아니면 라멘집 사장님들이 근면성실의 대명사인가? 묘한 궁금증이 든다.
우리만 놀란 것이 아니라, 태풍 짜미는 5-6년 만에 오키나와를 덮친 초대형 태풍이었다. 심지어 유명한 호텔도 정전은 물론, 더러는 창문도 깨져 피해가 컸다고 하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태풍 다음 날부터 5일 정도 한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복구가 얼마나 더디었는지 몰랐는데, 돌아와서 물어보니 요미탄은 3일 정도 정전이 지속되었다고 했다. 아이고, 우리도 그 3일을 정전 속에 보냈더라면 오키나와에 살고 싶은 열망이 조금 가라앉았을까. 여담이지만 이때 부러진 길가의 나무들이 금방 정리되지 않은 덕분에, 몇 달 뒤 우리 집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어줄 녀석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리를 비롯해 친구들 모두 큰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요란했던 태풍 짜미의 기억은 '오키나와 어디까지 경험해봤니'에 하나 추가되는 에피소드로 남았다.
2018년 제24호 태풍 짜미는 5등급의 슈퍼 태풍이었다. 오키나와에서만 50명이 다치고 300여 명이 대피했다. 일본 본토, 대만 등에 미친 영향까지 합하면 총액 26억 9,000만 달러의 큰 피해를 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