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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Jul 19. 2021

대학원생의 일상@오키나와

OIST 대학원생의 아침부터 삶이 있는 저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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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즈음,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알람 소리와 창 밖에서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새소리 덕분에 눈을 뜬다. 8시? 늦은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10시까지 출근이라는 다소 느긋한 연구실 규칙은 대전에 이어 오키나와에서도 계속되었다 (대학원생의 몇 안 되는 특권이다).


시리얼과 빵, 과일 등으로 간단히 차려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면, 집 건너편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린다. 대학원생은 이제야 일어나서 밥 먹고 있는데, 유치원생들은 벌써 그들의 하루를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있는 내 옷장을 열어본다. 계절이 있다곤 하지만 대체로 더운 오키나와의 날씨이기에 옷장은 대부분 반팔티들로 채워져 있다.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는 반팔티 중에서 맘에 드는 것으로 꺼내 입고 집을 나선다.



출근길, 혹은 매일매일 여행길


출근길 혹은 매일매일 여행길



주차장에서 밤새 쉬고 있던 뿡뿡이를 깨운 뒤 학교로 향한다. 도시락을 싸기 귀찮은 날은 출근길에 도시락 (벤또) 가게에 들린다. 도시락 가게에서는 300엔 정도면 꽤 푸짐한 도시락을 살 수 있다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보다 가성비가 훨씬 좋다). 월급날에는 고기와 돈가스가 조금 더 들어간 400엔짜리 도시락으로 기분도 내어 본다.


도시락을 챙겨서 다시 58번 국도 위로 펼쳐진 멋진 길을 따라 학교로 향한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25분 정도. 마침 대전에 있을 때에도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25분 정도 걸렸었다. 비록 대전에서의 출근길은 거리는 짧았지만 자동차와 신호등이 많았고, 여기 오키나와에서의 출근길은 거리는 훨씬 더 멀지만 푸른 바다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키나와에서의 출근길은 힘들 때가 없다.


특히 학교가 위치한 온나 (Onna)에 가까워질 때면 가슴이 조금 두근거린다. 매일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온나의 호텔/리조트 단지의 초입에 위치한 르네상스 호텔이 보인다. 코너를 하나 더 돌면,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인다. 오늘도 역시, 푸르다.



아침


연구실 옆 라운지에서 보이는 바다.



언덕 위 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연구실로 걸어 내려온다. 연구실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10시 가까이 되어간다. 꽤 늦은 듯 보이지만, 이렇게 내가 보통 두 번째 출근이다. 항상 나딘이 먼저 나와 있고 ("부지런한 독일 사람들"이란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친구다), 이어서 내가 자리를 차고앉는다.

굿 모닝!

가볍게 아침 인사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실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모습을 나타내며 OIST 인지신경로봇 연구실의 아침이 시작된다.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우선 연구실 옆 라운지로 향한다. 라운지 구석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100엔을 머신 옆 저금통에 넣고 에스프레소 샷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내린다. 아침에 마시는 진한 커피는 일종의 신성한 의식이다.

제 잠든 뇌를 깨우고 저널에 실릴만한 결과를 주소서.

그렇게 카페인 가득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지난밤에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전 연구를 시작한다. 대학원 생활 자체는 대전이나 오키나와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논문을 읽고 실험을 하고 로봇이랑 놀고 글을 쓰는 과정의 반복이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는데, 책상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탁 트인 창문 너머로 파란 바다가 보인다는 것이다. 도저히 집중이 안되거나 뭔가에 막힐 때면, 라운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본. 한때는 창문 하나 없는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2-3평 남짓한 실내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공부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 몇 걸음만 걸으면 푸른 바다가 보이는 여기는 천국이다.



누구나 기다리는 점심시간


점심시간마다 다양한 음식과 이야기로 가득 차던 연구실 옆 작은 라운지


12시쯤 되면 배고픈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각자 도시락을 들고 슬금슬금 연구실 옆 라운지로 모인다 (어느 나라에서든 배고픈 사람들이다). 나 역시 출근길에 사 온 도시락을 챙겨 들고 라운지로 향한다.


비록 날마다 그렇게 큰 변화는 없는 반찬들이지만, 우리는 매일 각자의 도시락을 보며 나름의 품평회를 다. "이건 뭐야? 어떻게 요리하는 거야? 하나도 안 매운데?" 등등. 라운지 테이블 위에는 연구실 친구들의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놓인다. 고기를 안 먹는 Vegetarian 친구들, 고기를 사랑하는 Meat lover 친구들. 사뭇 다른 그들의 도시락도 아무런 갈등 없이 테이블 위에 평화롭게 놓인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여기 OIST의 특징은 점심시간 라운지 테이블 위에서도 그렇게 발견할 수 있다.


점심시간의 대화 주제도 우리가 싸온 도시락들의 반찬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어젯밤 뉴스에 나왔던 세계정세에서부터,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던 각 나라의 미신, 풍습 이야기 그리고 지난 주말에 다녀온 오키나와의 여행지까지. 우리는 그렇게 점심시간 동안 식탁에 둘러앉아 짧은 세계여행을 다닌다.


점심시간이 마칠 때쯤이면 커피를 다시 한잔하며 오후를 시작한다. 오후 일과도 특별할 건 없다. 어디서든 비슷한 공대생의 일과 - 논문을 읽고 실험을 하고, 로봇이랑 놀고, 글을 .



공대생의 일상은 대전이나 오키나와나 비슷하다. 삽질의 연속이다.




퇴근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 주차장에서는 매일매일 바다너머로 해가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은 6시다. 퇴근 시간이라니! 대학원생으로서는 조금 낯선 개념이다. 대전에 있을 때 지도교수님이 만든 연구실 규칙엔 몇 시까지 올 것, 게임하지 말 것 등의 규칙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연구실처럼) 퇴근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규칙 때문에 지도교수님이 우릴 찾을 때 자리에 없으면, 그게 밤 11시더라도 우리가 잘못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데 여기 오키나와로 오고 나서는 6시 퇴근이라는 항목이 연구실 규칙에 새로이 추가되었다 (물론 더 남고 싶으면 더 남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학교 차원에서 각 연구실 지도교수들에게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의 '인권'에 관해서 몇 가지 사항들을 지키도록 권장했다고 했다. '대학원생의 인권' 이라니. 인권은 사람한테 주는 것이니 대학원생에게는 해당이 없다는 씁쓸한 농담을 하는 국내 일부 (과연 일부일까?) 대학원과는 달리, 여기 OIST에서는 대학원생의 처우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 주차장에 도착하면, 바로 앞 온나의 바닷가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게 보인다. 뿡뿡이를 타고 출근길에 달렸던 58번 국도를 다시 타고 집으로 향한다. 석양을 조금 더 지켜싶은 날엔 집 근처 세라노모리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용한 어촌 마을 너머 바다로 해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저녁이 있는 삶, 삶이 있는 저녁


호사스럽게도 여기 대학원생에게는 '저녁이 있는 삶'이 있었다. 가족과 저녁을 먹고, 산책을 가고, 석양을 바라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쉴 수 있는 그런 저녁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데, 왜 오키나와로 오기 전까진 몰랐을까?


에게 생소했던 '저녁이 있는 삶'은 다른 외국 친구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나 보다. 결혼 전, 그러니까 경희가 오키나와로 오기 전의 일이다. 기숙사에 같이 사는 친구들이 나에게 물었다. 저녁 이후에도 연구실에 남아 있는다는 것이 생소했던 그들은 나에게 '연구실에 늦게 남아서 무엇을 하냐'라고 물었고, 저녁 이후 집에 있는 것이 생소했던 나는 그들에게 '집에 일찍 와서 무엇을 하냐'라고 물었다.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저녁은 외식, 쇼핑, 산책과 같은 '삶'의 순간들로 때로는 빽빽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채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하루들이 하나하나 쌓여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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