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요가 8) 셀프 수련, 셀프 러브
요가에 관한 여덟 번째 글의 초고만 세 번째다. 주제도 모두 다른 초고. 이 글은 초고에서 더 고치지 않을 생각이라 마지막 초고이자 초고로 남을 초고다.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브런치는 내 인터넷 첫화면에서도 사라졌고, 요가와 내 사이는 조금 멀어졌다. 초반에는 대 전염병 시대가 남긴 잔재인 줌 수업을 받거나, 근처 요가원에 새벽요가나 주말요가를 띄엄띄엄 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요가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어느 요가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일지 않도록 인스타그램 속 멋진 요기니들을 멀리하며 해야하는 공부에 임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생애 처음 요가를 시작했을 때처럼 유튜브 속 선생님을 따라 셀프수련을 하며 여전히 약간 먼 요가와의 거리를 유지한 지 꽤 되었다. 실제로 뵌 적은 딱 한 번이였지만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나에게 엄청난 신뢰를 준 선생님 한 분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시는 덕분이다.
이 셀프 수련이란 게 참 재밌다. 처음에는 이 셀프 수련하는 내 모습을 영상으로 찍기도 했다. 집에서 혼자 수련하는 와중에도 이걸 카메라와 같은 누군가가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였는지 그래도 인스타그램에 뭐라도 올리고 인터넷 세상의 작은 데이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마음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내 그 영상을 찍으려고 옷을 갈아입거나 각을 살피거나 핸드폰을 미리 준비하는 일이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록을 과감히 생략했더니 그제서야 진정한 의미의 셀프 수련이 시작된 것 같았다. 떡진 머리에 잠옷도 갈아입지 않고 내 몸과 옷에서 나는 이런저런 냄새, 소리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도 되는.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을 매트 위에 올려두면서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이런 나에 대해 변호하거나 설명할 필요 없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오랫동안 수련을 쉰 다음에는 놀라울 만큼 굳어있는 몸 여기저기의 뻐근함 때문에 끄응 소리가 난다. 집 청소할 때가 다 되었으면 잠옷에서 먼지 냄새가 난다. 월경 중일 때면 가랑이 사이에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 가벼운 역자세를 할 때에도 질방구가 나온다. 스트레칭 없이 헬스장에서 러닝머신만 뛰다 보면 종아리가 이 정도로 뭉칠 수도 있구나. 순환이 안 되는지 겨드랑이 안쪽이 이렇게 갑갑하구나. 몸이 굳는 건 이렇게 순식간인데, 유연한 몸에 조금 더 채워보려 애썼던 근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구나. 패드 속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 아사나 자체에 몰입하는 게 아니라, 그 아사나를 수행하는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약간의 자리가 생긴다. 요가원에서는 마치 예배당에 간 것처럼 바깥의 나를 잊고 요가하는 나만 매트에 남겨두고 아사나에 집중했는데.
셀프 수련에서 셀프 러브로 마치 존재론적 전회와 같은 어떤 경험들 뒤에 비로소 명상에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요가는 움직이는 명상이라서 좋았지, 가만히 앉아서 아무 생각도 않는 그런 행위는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해왔다. 어쩌면 그냥 오래전 교회에서 명상을 죄악시했던 이미지가 내게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냥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요가는 운동이라도 되지, 명상은 가만 앉아서 내 몸에 어떤 유용함도 만들어내지 않는 무가치한 일이라고 여겼던지도. 명상을 하느니 음악을 듣는 게 원래 내가 하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명상가이드를 한번 들어보니까, 이거 앞에 선생님 없는 심리상담이나 비슷하다. 그냥 나대로 내버려두고 이렇게 가만하고 어찌 보면 무용한 시간을 허용하는 자체가 그렇다. 고작 10분, 20분인데 그 내려놓음을 통해 나 자신에게 '이렇게 나여도 괜찮잖아'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요즘은 집안일을 할 때 명상가이드를 듣는다.
무엇도 되지 않은 상태의 나를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과거형이지만, 과거형만은 아니다. 여전히 쉽지 않다. 나조차 사랑하지 못하는데,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일마저 너에게 외주 맡기고 나몰라라 할 지경인데. 이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이 참 쉽지가 않다. '다정함'을 크게 평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정함이 내겐 뭔가 헛헛하게 느껴졌다. 미끌거리면서 잡히지 않게 다정하기보다 살을 붙이며 함께하고 싶고, 책임지고 싶고, 그러기 위해 유능하고 싶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였는데. 내가 참 부족함 없는 사랑을 물리적으로 누리고 살아서 그랬구나 싶다.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라서. 누군가를 다정한 눈으로 보고 사려 깊게 대하는 일이. 그래서 누군가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전능자가 어딘가에 있어서 나를 다정한 눈으로 보고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준다고 믿고 그 관념적인 사랑에 온 마음과 생을 쏟기도 하는 것 같다.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이랑의 <shame>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가 나를 너무나 연약하고 반짝거리던 2013년 즈음으로 데려가서, 이 가사에 관한 짧은 글이 들어있는 이랑의 에세이를 사기도 했다. 나는 이제서야 그때의 나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 같다. 나를 사랑하지 못할 수도 있는 나로, 그래서 너를 나의 존재를 위해 필요로 하기도 하는 나로, 그래서 사랑이 다정이 얼마나 귀한지 떨리게 아는 나로.
오늘 이 글을 쓰는 건 꼭 써야만 하는 마음이 일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목전에 앞둔 불안으로 회피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반드시 오늘 기록해야만 살아갈 수 있어서 갑자기 자리에 앉았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떠났고, 또 한 사람이 떠났다. 이야기의 끝은 설명할 필요도 없고 카테고리화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끝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은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할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필요 없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껴안는 게 영 쉽지 않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