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대신
짝꿍이 건넨 건 물감처럼 녹아내린 m&m 초콜릿.
살면서 만나는 특별한 존재들이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씩 바뀌던 짝꿍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바꾸니 12달에서 2달의 방학을 제외한 10달에 12학년을 곱하면 120명의 짝꿍을 만난 셈이 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두 명의 짝꿍이 기억에 남는다. 이름과 얼굴은 기억 소각장에서 재가 되어 날아간 지 오래지만 그 친구들이 베풀었던 호의만큼은 장기 기억구슬로 남아 있다.
첫 번째 짝꿍은 울망이. 볼록렌즈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을 주는 눈망울을 가진 친구였다. 말이 유독 없던 친구라 어린 마음에 그런 모습이 무서워 괜히 고개를 반대로 돌리곤 했다. 짝꿍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진 것은 소풍 때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아가 커져 친한 친구들과 같이 앉지만 그때는 한 번 짝꿍이 되면 영원한 짝꿍이었다. 교실에서도 옆자리, 버스에서도 옆자리인 거다. 동물원에서 구경을 하고 잔뜩 걸어 지친 채로 버스에 올랐다. 깜빡 잠에 들었다 깬 것 같은데 갑자기 옆에서 울망이가 말을 걸었다. 어머니가 멜론을 잔뜩 싸주셨다면서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무조건 착한 사람이다. 비염으로 입을 벌리고 잤기 때문에 마침 목이 타기도 했고 언제 먹어도 좋은 게 멜론이라 반사적으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메고 있던 가방에서 울망이는 주섬주섬 도시락통을 꺼냈다. 가지를 닮은 보라색 뚜껑을 여니 녹초가 된 멜론이 등장했다. 아무래도 도시락통이 가방에 담긴 채로 왔다 갔다 하며 흔들리니 물러졌나 보다. 그 옆칸에는 멜론의 과즙에 침식 당한 m&m 초콜릿이 색색의 무지개를 뿜어내고 있었다. 흙 때가 낀맨손으로 먹어야 하는건가 고민하는 그 때 울망이는 야무지게 챙겨온 이쑤시개를 건넸다. 물이 옷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손으로 받혀 베어문 멜론은 미지근하고 혀가 아리게 달콤했다. 온도가 높을수록 단맛이 잘 느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이유리 작가의 소설 『비눗방울 퐁』의 유현은 죽기 전 먹고 싶은 음식으로 참외를 꼽는다. 천상의 멜론을 먹어본 적이 있는 나는 유현의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푹 익은 과일엔 설탕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달콤함이 있다. 여름의 멜론을 정의하는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거품목욕을 하며 먼저 다가와 준 울망이의 용기와 멜론의 여운에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두 번째 짝꿍은 밤송이다. 식빵 겉면처럼 구운듯한 피부에 뾰족뾰족한 스포츠 머리를 한 친구였다. 울망이의 알록달록한 m&m 초콜릿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밤송이가 연상된다. 왜냐하면 밤송이는 나에게 수채화 물감을 빌려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저학년 때에는 심리적으로 미술시간과 음악 시간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무래도 미술시간에는 색연필과 물감을, 음악시간에는 리코더, 캐스터네츠, 트라이앵글 같은 준비물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이 원인인 것 같다. 하루는 물감을 챙겨와야 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제일 기대하고 좋아하는 미술시간에 이런 실수를 하다니...!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선생님께 혼이 날까 불안에 떨고 있는 나에게 밤송이는 물감이 가지런히 짜진 팔레트를 내쪽으로 밀며 마음껏 써도 된다고 했다. 그 순간만큼은 밤송이에게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친구가 기억에 유독 남는 이유는 다음부터다. 밤송이가 뒷정리를 하며 잿빛이 된 물을 식수대에 버린거다. 식수대에서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물은 까만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니 이 물도 똑같은거라고 생각한걸까? 나에게 준비물을 빌려준 만큼 사고방식도 순수했던 것 같다. 밤송이가 물감을 빌려줬으니 내가 얼른 뒷정리를 했다면 밤송이가 선생님께 눈물이 빠지도록 혼나는 일은 없었을텐데라는 자책이 들었다. 나는 그래도 제대로된 처리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한마디라도 해줄걸. 고마운 마음에 미안한 마음이 겹쳤다. 꼭 단맛 뒤에는 약간의 쌉쌀함이 딱라오는 m&m 초콜릿처럼.
이처럼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던 짝꿍들 덕분에 어린이 시절을 떠올리면 다채롭다. 울망이와 밤송이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은혜를 입었는데 그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했던 기억이 없다. 고마워! 라는 말 대신 이 글을 통해 '정말정말 고마웠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