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언니(맥주)

어른의 장점 1가지

by Gourmet

1일 1 치킨보다 1일 1 맥주.


땡땡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4학년을 일탈 없이 보내는 게 아쉬워 수업 4개를 제끼고 일본에 다녀왔다.

여행의 목적은 언니 괴롭히기. 농담이다.

막내언니가 일본에 살고 있어 놀러 오면 가이드를 해준다기에 비행기표를 끊었다. 언니가 살고 있는 지역은 과일의 왕국 오카야마. 놀 거리가 없다고 해서 도쿄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촌임에도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모두 다르지만 언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계획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무릇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동선별로 완벽한 시간표를 짜놓고 하나씩 클리어하는 재미로 여행을 한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 갈 곳 한 군데만 정해두고 계획을 마무리했다. 물론 각 장소에 가는 방법은 친절한 한국인들의 블로그 덕을 봤다. 에너지 절약에 도움을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해요!

두 번째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맥주!

우리 엄마랑 아빠는 술을 즐기지 않으시는 분들인데도 언니와 나는 서울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알코올에 강하다. 우리 집에서는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언니를 만나면 술을 마실 구실이 생긴다.

그래서 3박 4일 동안 1일 1 맥주를 했다.

첫날은 편의점 오뎅에 아사히 맥주를, 둘째 날은 회덮밥에 오카야마산 복숭아 맥주를, 셋째 날에는 야타이 음식에 오리온 맥주와 라무네를 마셨다. 넷째 날은 비행기를 타야 했으므로 패스. 맥주의 유혹보다 컨디션 관리가 중요한 저질 체력들이었기 때문에.


첫날: 망각을 위한 맥주

첫날에는 맥주가 간절히 필요했다.

혼자 비행기를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내 행태를 설명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유심을 미리 예약해 두었으면서 영업시간을 확인하지 않는 멍청한 실수를 했다. 픽업 가능 시간은 아침 7시였는데 나의 비행기는 8시였다. 버스 사정으로 공항에 4시간 전부터 도착해 놓고 짐을 미리 부치고 그제야 유심을 다시 확인했다.

여행 블로그를 뒤져보니 탑승구까지 40분이 걸렸다는 후기에 불안해져 4일 하루 3GB를 쓴맛을 삼키며 포기했다. 막상 탑승구에 도착하니 유심을 가져왔어도 충분히 남아도는 시간이었다.

1만 원을 날렸다고 후회하며 2시간을 참회하고 있었는데, 일본 현지에서는 5일 하루 1GB의 선택지만 있었고 심지어 3만 원이었다. 그렇다. 나는 1만 원이 아니라 3만 원을 날린 것이다. 우매함에 대한 자책을 날리기 위해 탄산감이 강한 아사히 맥주를 골랐다. 끓어오르다 마침내 터져버리는 거품처럼 나의 돈을 날려 비루한 마음이 소실되기를 바랐다. 망각을 위한 맥주인 셈이다. 돈을 날린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양에 비례하는 가격으로 300ml를 골랐는데 기억 잃기에는 실패했지만 잠을 푹 자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둘째 날: 피로회복제를 대신한 맥주

정해둔 일정이 디즈니씨였다. 그동안 일정상 또는 사람이 적은 때를 노려 테마파크에는 오후에만 놀러 갔었다. 이렇게 오전부터 놀이공원에 간 건 오랜만이었다. 언니도 인생에서 이번이 가장 많이 돌아다닌 때였다고 했다. 보통 놀이기구를 7개 정도 타면 많이 탄 거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8개를 타고 불꽃놀이까지 감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건 다 가격 때문에 점심과 저녁을 거른 덕분이다. 물론 간식을 틈틈이 먹어 기절하는 건 방지했다. 놀이공원의 비싸고 귀여운 모양보다는 맛을 중시하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숙소에 가서 배달을 시켜 먹기로 합의했다.

빠질 수 없는 맥주는 편의점에서 살까 했지만 막상 짐을 두러 숙소에 들어오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힘이 없었다. 마침 언니가 내 선물로 사 온 오카야마산 복숭아 스파클링 맥주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술을 마시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이 친구를 소비하기로 했다. 물방울이 된 인어공주처럼 살짝 분홍빛을 띠는 맥주는 샤워 동안 냉장고에 넣어두어 기분 좋게 시원해졌다. 캔을 따자 복숭아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음료수로 착각할 만큼 당도가 높아 맹렬한 놀이기구와 끊임없는 걷기에 지친 몸을 회복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 모금 마시자 복숭아의 달콤함이 입안에 번졌다. 탄산이 혀를 톡톡 자극했다. 피로가 스르르 풀렸다. 언니와 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 탄 놀이기구를 하나하나 복기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셋째 날: 흥을 돋기 위한 맥주

일본에 대한 낭만 하면 당연히 축제다. 원래 둘째 날에 불꽃놀이 축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체력상 무리이기도 하고 가격은 다르지만 축제 입장료를 낼 바에는 디즈니씨에서 하는 퍼레이드를 선택했다. 대신 축제 음식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어서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던 중 유튜브에서 도쿄의 시모메구로 축제 브이로그를 봤다. 마츠리의 개념보다는 엔니치에 가까운 느낌이라 공연은 없고 다양한 길거리 음식과 금붕어 잡기, 슈퍼볼 건지기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반 축제보다 한산하면서도 먹어보고 싶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었다. 내리막길과 계단을 반복해서 오르락내리락했더니 목이 말라 마실 거리부터 찾았다. 마침 입구 정면에 맥주와 라무네가 옹기종기 들어있는 아이스박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사히 맥주는 다 팔렸다고 해서 언니는 오리온 맥주를, 나는 라무네를 골라 1만 엔을 건넸다. 세븐일레븐 ATM기에서 지원하는 최소 단위가 1만 엔이라 죄송한 마음으로 지폐를 건넸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울망한 고양이 눈으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외쳤다.

맥주와 라무네의 둥둥 떠오르는 기포는 설렘으로 부푸는 감정과 닮았다. 그 뒤로 야끼소바, 당고, 카키고오리, 초코바나나 등을 잔뜩 사 와 적당한 턱에 걸터앉았다. 모락모락 음식 연기와 반짝반짝한 전구 불빛을 바라보며 먹거리를 만끽했다. 야끼소바는 소스가 진하고 짭조름했다. 면발이 쫄깃하게 씹혔다. 당고는 쫀득한 식감에 달콤한 간장 소스가 배어들어 있었다. 카키고오리는 얼음이 눈처럼 부드러웠고, 시럽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초코바나나는 바나나의 달콤함에 초콜릿 코팅이 바삭했다. 언니는 오리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역시 축제는 맥주지."

나도 라무네 구슬을 딸각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이야기를 풀어준다. 모든 주당들이 대는 핑계일 수도 있지만 술은 장점이 많다. 우선 맛있다. 그리고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고 또 더 중요한 것으로 잘 듣게 해 준다. 3박을 언니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언니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평생 동안 언니에 대해 알게 된 것들보다 더 많았다.

왼쪽 눈꺼풀이 느리게 떠지는 언니 특유의 표정이 맥주를 마시면 더 자주 나타나 언니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이유를 만들어 준다는 것. 직장에서 고됐던 에피소드부터 맥락을 읽을 줄 모르는 작은 오빠가 언니의 거북알을 먹어버린 웃픈 이야기까지.

내가 언니에게 대해 모르는 것이 참 많았구나를 느꼈다.

늘 그랬듯 여행에서 남는 것은 관광지의 명물, 이곳에서만 파는 음식보다 같이 여행을 간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사소하면서도 의외의 특성들인 것 같다.

무릇 여행에서뿐 아니라 누군가를 더 알고 싶다면 같이 맥주 한 잔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에디킴이 부릅니다. <너 사용법>.

"너무 지칠 땐 소주 두 병 들고 솔직하게 그녀의 집 두드리시오."

아직 나에게 소주만으로는 너무 쓰다.

"너무 지칠 땐 맥주 두 캔 들고 솔직하게 그녀의 집 두드리시오."라고 부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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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차의 회덮밥과 복숭아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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