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승부욕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엄마에게 듣기로는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다른 친구의 그림을 칭찬해 줬다고 내가 난리가 나서 전화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궁서체 잘 쓰기를 내가 1등으로 잘해서 뿡뿡이 비타민 캔디를 받고 싶어서 연습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도 전교 4등으로 졸업을 할 때 4등이 만족스러운 게 아니라 1등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도 달성군 출신이라 나를 처음에 무시하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낮은 성적에서 노력해서 성적을 올려가며 조기 진학까지 해서 나를 무시하던 친구들은 이겼다는 생각을 한다.
과거의 힘든 일을 누군가를 이기면서 극복하기도 했고, 이기면서 좋은 일이 같이 발생해서 나는 이긴다는 걸 절대 선으로 여기기 시작했나 보다.
나는 누군가를 이기면 성취감을 느낀다. 졌을 때는 심각한 패배감을 느낀다. 뭔가를 못한다에 대한 심각한 결핍이 있다. 가령 어떤 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을 때 나는 우수상을 타서 좋아한다기보다 최우수상을 못 타서 슬퍼한다.
한 살 차이 나는 동생에게도 나는 단 한 번도 져준 적이 없는 것 같다. 24살이나 먹은 지금도 최근에 가족여행으로 온천에 가서 저녁에 해산물, 치킨, 라면 등 먹고 싶은 걸 가득 먹는데, 앞에 앉은 동생이 먹는 걸 보다 보니 왠지 내가 먹고 싶은 걸 다 빼앗길 것만 같아서 과식을 하고 결국 그다음 날 응급실에 갔다...
물론 승부욕이 강해서 학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공부도 어느 정도 해서 카이스트에 와서 보니 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고, 운동도 개나리부에서 거의 대부분이 나보다 잘하는 모습을 보면 이제 그 승부욕으로 효용을 얻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사실 이제는 더 이상 이길 수 없으니 체념하는 것이려나.
사실 이건 연애나 친구관계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나는 당연하게도 남자친구에게도 승부욕을 느꼈는데 주위에 물어보니 이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 취미를 같이 하는 남자친구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취미를 잘해야 한다. 너무 성취주의적 성향 같은가? 맞다 나는 이걸 최근에 느끼기 시작했다.
최근에 이별을 하고 친구들과 같이 내 소개팅 조건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친구는 본인 남자친구가 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좋다고 했다. 반면 나의 과거 남자친구들을 살펴보면, 나는 테니스를 전투적으로 치지 않는 남자친구에게 대회에 같이 나가기면 하면 몰아붙였고, 응원을 가서도 이겨내라며 격려했다. 얼마나 못됐는가...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왜 그렇게 1등 하는 남자들을 좋아할까. 축구동아리, 테니스 동아리, 수영동아리까지 모두 그 동아리에서 한가닥 하는 사람 사실은 테니스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 동아리에서 그 운동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목맸다. 그 남자들은 나에게 크게 애정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근데 나는 그 사람들을 가장 잊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다정하지도 않았고, 좋은 남자도 아니었는데 그 남자들을 잊는데 나는 오래 걸렸다.
나 혼자 승부욕이 강할 때는 크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게 남자 보는 시각에도 적용되니까 큰 문제라고 느껴진다.
친구관계에서도 나는 관계를 수직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나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언니들을 절대적으로 우상화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나보다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기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 가장 잘하지 않아도 의미가 있다. 져도 그 과정에서 스스로 노력한 내가 떳떳하면 된다고 매번 다짐하지만 실제로 졌을 때는 그렇게 생각이 잘 안 된다. 진 스스로를 자책하고 다음에 어떻게 이길지 생각한다.
어떻게 마음을 바꿔먹을 수 있을까. 스스로가 이런 걸 알고 계속 스스로를 다스려야겠지. 이렇게 다스리다가도 잠시 잠시 마음을 놓은 순간에 이런 모습이 튀어나오고 여린 주위 사람들이 상처받는 걸 보며 반성한다.
instagram에서 성취중독자를 위한 호신술 17 가지를 봤는데 내가 태어나서 거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장들이라 적어본다.
1. 그쯤이면 충분해
2. 기대 이상으로 잘하라 필요 없어
3. 할 수 있다고 해서 해야 하는 건 아냐
4. 내 정체성과 가치는 성취에만 달린 게 아니야
5.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냐
6. 항상 내가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냐
7. 내 문제가 아냐
8. 이건 취미일 뿐 최고가 될 필요 없어
9. 네가 이것 좀 대신해 줄 수 있을까
10. 이미 할 일이 너무 많아
11. 실패는 성장의 기회야
12. 난 번아웃이야
13. 인내심을 갖자
14. 내 성공은 스스로 정의할 거야
15. 난 도움이 필요해
16. 작은 목표를 이루는데 집중하자
17. 소소한 성공을 축하하자.
'내 정체성과 가치는 성취에만 달린 게 아니야'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내가 어떤 상을 받고, 어떤 성적을 내는지를 중심으로 나를 평가했는데 사실 그게 아닐 수 있었다는 점이 그래서 내가 나를 갉아먹었다는 게 느껴져서 소름이 돋았다.
또 취미에서 이건 취미일 뿐 최고가 될 필요 없어라는 문장에서도 나는 테니스에서는 입상을 꼭 하고 싶었고 수영에서는 더 빠르고 싶었고, 더 높은 반에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힘들어도 수영을 했다. 취미에서도 최고가 되어야 재밌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사실은 취미는 즐기면서 행복해하는 게 맞다.
또 난 도움이 필요해라는 문장에서도 나는 지금까지 친구들에게 나 힘들어, 나 좀 도와줘라는 말을 하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이별을 하고 친구들에게 자연스레 처음 해봤는데 너무 의지가 되었고, 덕분에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다.
소소한 성공을 거뒀을 때 나는 지금 만족할 수 없어, 지금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그마저도 다 축하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걸 다시 느낀다.
내가 내 정체성을 성취중심적이 아니라, 과정 중심적으로 나를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더 다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