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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이 싫어요

그래도 좋아해 봐야지

by 기서우

하루가 다르게 날이 더워지는 요즈음이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한 사람으로서는 굉장한 고역일 따름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따갑게 눈을 찌르는 햇살도, 조금만 걷다 보면 피부 위로 조금씩 맺히기 시작하는 땀방울들도, 밤이 오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밝고 쨍쨍한 오후 여섯 시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여름이 정말로 싫다.


다만, 맹목적인 증오 내지는 혐오가 결국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래로, 나는 어떻게든 싫어하는 대상의 좋은 점을 찾아 그것을 조금이나마 좋아해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어쩌면 노력보다는 발버둥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여름이라는 계절에도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한두 개쯤은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여름과 관련하여 좋은 인상을 남겼던 몇 편의 영화들과 함께 여름의 매력에 대해 고찰하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했다. 이따금 이런 시간을 가지다 보면 언젠가는 여름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현실과 몽환의 경계, <한여름의 판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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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여름날 특유의 나른함이 자아내는 몽환적 분위기의 묘사에 집중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환상과 현실의 구분을 무의미하게끔 만드는 영화이다. 여름의 온도와 채도만이 선사할 수 있는 한시적 아름다움이 있고, 그 찰나의 아련함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여름이 아닌 그 어떤 계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득이 설파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돌이켜 보면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발생하는 불쾌함 혹은 수고로움과 별개로, 나에게도 여름은 여러모로 애틋한 기억들이 제법 많이 녹아 있는 계절이다.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기억들은 이상하게도 대다수가 여름 안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니 말이다. 분명 과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덥고 지치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터인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그저 한여름의 꿈결처럼 떠밀려 오니 무척이나 신비할 따름이다.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이 뜨거운 여름도 먼 미래에는 결국 눈부신 판타지아의 일부로 기억되리라는 상상을 하며, 오늘도 무더운 하루를 애써 반겨 본다.



내 인생의 여름은 언제였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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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강렬하고 열정적이었던 시기를 흔히 ‘인생의 여름’이라고 비유적으로 이르곤 한다. 여름의 햇살이 제아무리 뜨거워봐야 우리네 삶이 빚어낸 찬란함에 비견될 수는 없으리라고 공연히 몽상에 잠기던 시절도 잠시 있었으나, 맹렬한 더위로 우리를 옥죄곤 했던 최근의 여름들을 떠올려 보면 그러한 비유가 반드시 설득력이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 요즈음이다. 몸과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는 시기라는 점부터, 즐거움과 괴로움이 동시에 뒤따른다는 점,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모두 아름다운 낭만으로 치부된다는 점까지, 우리네 인생의 전성시대와 여름이라는 계절은 상당 부분 꼭 닮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이라는 무대적 장치를 활용하여 사랑이 선사하는 한시적 낭만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비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그야말로 우리네 인생의 여름을 추억하기에 제격인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와 함께 내 인생에서 여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기는 과연 언제였는지 찬찬히 되새기다 보면, 다행히 여름이라는 계절도 마냥 고약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 듯하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다면 여름에는 장마가 있는 게 아닐까, <언어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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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후드득후드득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려오는 순간이면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곤 한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부터 비가 오는 날을 유독 좋아하는 나였다. 평소보다 조금 어두운 분위기의 아침과 적당히 불쾌한 습도가 내면의 우울감을 적당히 중화시켜 주는 것만 같아서, 역설적이게도 그 음울한 분위기에 기분이 곧잘 좋아지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철의 장마는 지독한 계절을 헤매고 있는 나에게 있어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요, 한 줄기 구원과도 같았다.


<언어의 정원>은 ‘비 내리는 날’을 개인의 심리적 불안정으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기 위한 안식처로서 활용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이다. 이처럼 인간 내면의 나약함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작품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적 결함이 모두에게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사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크나큰 위로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여름 앞에서 간단히 무너져 내리지만, 더 이상 그 사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줄기에 숨어 여름의 햇살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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