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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서우 Oct 20. 2022

기차에는 낭만이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차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성이라는 게 있다. 머나먼 곳 혹은 낯선 곳을 향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설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이 만들어내는 마음의 일렁거림, 철컹철컹 소리를 들으며 창가에 비친 나의 얼굴을 문득 바라보았을 때 찾아오는 이유 모를 공허함까지. 이것이 정말로 기차만이 가지고 있는 낭만인 건지, 먼 곳을 향하고 있다는 기대감 내지는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낭만의 허상인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서도, 어쨌거나 기차가 우리에게 특별한 감정을 선사하는 교통 수단이라는 점은 쉬이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기차 특유의 낭만을 적절히 활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들 또한 결코 적지 않은 편이다. 바쁜 일상을 잠시 떠나 기차에 몸을 싣고 감상에 직접 빠져들어볼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이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으니 영화들을 통해 기차의 낭만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 것도 가히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기차의 낭만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니. 정말 좋은 세상이야.


기억과 감정은 별개인 걸까? <이터널 선샤인>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조엘은 아픈 기억만을 말끔히 지워준다는 라쿠나사를 찾아가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갈수록 조엘은 자신의 선택이 신중하지 못했음을 서서히 깨닫게 되는데⋯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제목조차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과 감정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기억만을 깔끔하게 지워준다는 가상의 극중 기업 '라쿠나사'는 마치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와 관련된 감정 또한 말끔히 사라지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고객들을 현혹시키지만,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은 기억이 남기고 간 감정의 흔적으로부터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정녕 기억과 감정은 불가분에 관계에 해당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여러분의 감상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차는 굉장히 특별한 배경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영화의 두 주인공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극중 첫 만남이 바로 기차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2월의 공기와 기차 속 두 남녀의 모습이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건조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 도입부의 분위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순식간에 <이터널 선샤인>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다. 이토록 아름다운 기차 속 광경을 필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서로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멀리 떨어져 지내야만 했던 타카키와 아카리.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밤, 타카키는 아카리를 직접 만나기 위해 머나먼 여행길에 오른다.


 2017년, <너의 이름은>을 통해 대한민국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기작 <초속 5센티미터>는 첫사랑 특유의 애틋함을 스크린 속에 그대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수의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이끌어낸 작품이다. 첫사랑을 소재로 하는 다수의 미디어가 풋풋한 시절의 설렘 내지는 과거에 대한 향수에 주목하고 있다면, <초속 5센티미터>는 우리가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첫사랑의 아련함에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사랑이라는 소중한 기억을 굳이 희극이나 비극 따위로 포장하지 않고 그저 현실적인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는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마음 속에 고요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초속 5센티미터>의 남자 주인공 '타카키'는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는 여자 주인공 '아카리'를 직접 만나러 가기 위해 추운 겨울날 기차에 몸을 싣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매섭게 내리는 눈, 기록적인 폭설로 인해 자꾸만 연착되는 열차, 계속되는 연착에 지친 나머지 점점 줄어드는 승객들, 마치 텅 비어 있는 듯 공허해진 열차의 분위기. 고요한 열차 속에서 '타카키'는 오로지 '아카리'를 만나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끊임없이 밀려오무료함과 외로움을 이겨낸다. 이토록 짙은 감상에 잠긴 기차 속 광경을 필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기차는 좀비를 싣고, <부산행>


정체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대한민국. 열차에 몸을 실은 승객들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희망이자 안전지대인 부산에 당도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K-좀비 영화 <부산행>은 그야말로 국산 블록버스터 영화계에서 기념비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영화계에서는 다소 익숙지 않았던 소재인 좀비를 한국이라는 배경에 적절히 융화시킴으로써 완성도와 오락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의 성공에 힘입어 이후에도 <반도>, <지옥> 연출하는 등 한국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부산행>에서 기차는 그야말로 극 진행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무대이다. 폐쇄적이고 선형적인 열차의 구조는 인간과 좀비의 대립 구도를 한층 더 긴장감 있게 묘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현실의 기차 승객들로 하여금 '혹시나 영화에서처럼 갑자기 좀비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상상을 하게 만듦으로써 영화가 관객들의 뇌리에 꾸준히 남게끔 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응? 후자는 조금 오버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상상력이 풍부한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어쨌거나 <부산행>에서 묘사되는 열차 속 아비규환이 관객들의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참신한 상상력이 발휘된 기차 속 광을 필자는 역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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