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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서우 Oct 27. 2022

난 내 삶의 끝을 본 적이 있어

뭐야 나도 보여줘요

 다소 우울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조금 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해보자면, 삶이란 곧 죽어가는 과정이다. 흔히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이후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우리가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죽음 뒤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각종 신화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의 계기일 수도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후세계에 대한 다채로운 상상은 인류와 아주 오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인류는 죽음 이후의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각종 징벌적 성격의 신화나 서정적인 동화의 저편으로 밀어넣었다. 그 결과,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소 의식적으로 외면한 채, 낙원에 대한 희망 혹은 징벌에 대한 불안에 우리의 마음을 기댐으로써 죽음 앞에서 조금이나마 초연해질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삶 이후의 죽음 이후의 삶, 그것에 대한 상상이 우리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토록 매력적인 사후세계라니, <코코>


뮤지션을 꿈꾸는 소년 미겔은 고인이자 전설적인 가수인 에르네스토의 기타에 손을 댄 것을 계기로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의문의 사나이 헥토르와 함께 삶과 죽음을 오가는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과연 미겔은 무사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까?


 <코코>는 멕시코의 실제 명절인 '망자의 날'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다. 매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간 진행되는 망자의 날 기간 동안, 멕시코인들은 고인의 사진과 음식으로 제단을 꾸며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가족들의 추모를 진행한다.  <코코>에서 묘사되는 망자의 날은 이승뿐 아니라 저승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기념일이다. 이승의 누군가가 자신의 사진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추모를 진행해준다면, 사후세계에 있던 고인들도 망자의 날 기간 동안은 이승에 직접 방문해 제사 음식을 먹으며 가족들을 살피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아무한테도 추모를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승에 방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소리인데, 살아 생전에 주변인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죽어서도 매년 외로이 명절을 보내야만 한다는 무서운 메시지가 담겨있는 영화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코코> 속 사후세계는 굉장히 매력적인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 망자의 날이라는 국민적 기념일이 시간적 배경인 탓에 더욱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영화 속 저승의 사람들은 시종일관 음악과 축제의 흥취에 몸을 맡긴 채 오히려 이승의 사람들보다 더욱 열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는 듯한 모습을 보여다. <코코>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저승 이야기를 한번 믿어보자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저승에서의 새로운 삶은 물론 일 년에 한 번씩은 이승에 방문할 기회까지 주어진다니, 이 정도 복지라면 죽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


죽는 게 싫다고? 나는 태어나는 것부터 싫은데? <소울>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영혼들이 지구에 태어나기 전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는 장소인 '태어나기 전 세상'. 조는 그 곳에서 유일하게 지구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의 멘토를 맡게 된다.


 맨홀 뚜껑 아래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겪은 <소울>의 주인공 '조'는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이라는 곳에 당도한다. '태어나기 전 세상'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이 자신의 흥미나 관심사를 발견하는 장소로, 지구에서 태어나는 인간의 몸에 주입될 영혼을 양성하는 일종의 교육 기관과도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여러 오해와 우연이 겹친 끝에 '조'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지구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는 영혼 '22'의 멘토 역할을 맡게 된다. 불행한 사고로 이렇게 인생을 끝마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조'와, '조'가 그토록 되찾고 싶어하는 지구에서의 삶을 전혀 원하지 않는 '22'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케미가 궁금하다면, 지금 당장 <소울>을 감상해보도록 하자.


 '태어나기 전 세상'의 영혼들이라는 개념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가정해본다면, 사실 '22'뿐만 아니라 그다지 지구에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영혼들이 다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지구에서의 삶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삶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살다 보면 불행하고 우울한 일도 많이 있지만, 인생이 이따금 우리에게 선사하는 행복과 즐거움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는데 말이지⋯ 만약 우리가 '조'처럼 갑자기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영혼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까?


어쨌거나 죄 짓고 살지 말자, <신과 함께 - 죄와 벌>


저승법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쳐야만 한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7개의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무사히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화재 현장에서 어린 아이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소방관 자홍은 그의 변호사 역할을 자처하는 저승 삼차사와 함께 지옥에서의 재판길에 오른다.


 <신과 함께 - 죄와 벌>은 한국 신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저승을 모티브 삼아 권선징악의 중요성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사후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착하게 산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지고, 나쁜 짓 하고 살았던 사람은 벌을 받게 된다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저승에서의 재판이라는 것이 재판관의 성미에 따라 판결이 좌우되는 등 썩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작품의 원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국 신화라는 것이 워낙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재판이 다소 불합리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재판의 공정성 문제는 일단 차치해 두기로 하고, 영화 내에서 묘사되는 지옥의 형벌이 아주 어마무시하다는 점 또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생전 악독한 거짓말을 일삼은 사람은 혓바닥이 가위로 잘리고, 가혹한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날아다니는 바위 폭풍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등 <신과 함께 - 죄와 벌>에서 그려지는 죄인의 형벌은 그야말로 잔혹하기 그지없다. 혹자는 악인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감상만은 모두가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리라 믿는다. 이러나 저러나 혹시 모르니까 나쁜 짓 하고 살면 안 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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