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짜증이 나고 미운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쉽게 인연을 끊어버릴 수 없는 상황. 아마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관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탓일 수도 있고, 나도 모르는 새 소위 이야기하는 '미운 정'이라는 게 들어버린 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저 우리가 사랑 없이는 증오라는 감정을 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미움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은 한편으로 퍽 난제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사실 우리는 해당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진심을 다해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해당 질문에 이런 식으로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대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으로부터 언제든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식으로 사랑 위에 덧씌워진 상처들은 어느 순간 애증이라는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변모해버리고 만다. 우리가 끊어낼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관계의 악순환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재수는 없지만, <멋진 하루>
희수는 이전에 빌려주었던 350만 원을 받아내고자 헤어진 남자친구 병운을 찾아간다. 희수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자신의 지인들에게 급전을 부탁하는 병운. 희수는 병운을 차에 태운 채 그와 함께 돈을 꾸러 다니기 시작한다.
어지간히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면, 헤어진 연인이라는 대상은 그야말로 애증의 표본과도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못난 점과 한심한 점을 너무나도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우리는 그에게 쉽게 짜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한편, 그 사람의 예쁜 점과 아름다운 점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닳고 닳은 애정의 끈을 쉽게 놓아버릴 수조차 없다.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감정의 굴레에 빠져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멋진 하루>의 주인공 '희수'가 처한 상황이 딱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자신에게 빌린 돈을 갚을 능력조차 없어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병운'의 모습이 정말이지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그녀는 이따금 그가 특유의 진중한 매력을 드러낼 때마다 끊임없는 감정의 동요를 느낀다. 이러한 '희수'의 태도에서 짐작해볼 수 있듯이, 애증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우리가 상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오롯이 미워하거나, 사랑하기에는, 우리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정이라고 하자, <고령화 가족>
철없는 백수 한모, 흥행 참패 영화감독 인모, 결혼만 세 번째인 로맨티스트 미연, 그런 미연을 쏙 빼닮은 사춘기 여중생 민경까지. 나잇값 못하는 가족들이 평화롭던 엄마의 집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정말로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네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주변의 인간 관계가 항상 우리의 바람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의 짓궂은 친구나 선생님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안 드는 직장 상사나 동료, 요상한 이해 관계에 얽혀 시답지 않은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람들까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이지 우리가 생전 바라지도 않았던 수많은 관계들이 우리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반인륜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비자발적 인간 관계, 즉 '가족' 역시 우리가 '바란 적 없던 성가신 관계'의 대상 범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처지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령화 가족>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에 대해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을 품고 있다기보다는, 서로를 자신의 인생에 참견하지 않았으면 하는 귀찮은 존재, 혹은 그 나이를 먹고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존재 등으로 여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나 서로를 귀찮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다들 가족이라는 관계의 끈을 선뜻 놓아버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관계의 시작을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오래도록 지속된 관계는 어쨌거나 이처럼 쉽게 떼어버릴 수 없는 우리네 삶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 복잡한 관계의 기반이 되는 감정을 대체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사랑'은 오글거리고, '증오'는 조금 너무한 것 같으니까, '애증'⋯ 아니, 그냥 편하게 '정'이라고 하자.
난 너 없이는 못 살아, <다크 나이트>
자경단 활동을 펼치며 범죄와 부패로 들끓는 고담시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배트맨. 그러던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광기어린 인물 조커가 등장하며 고담시는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누군가에 대한 지속적인 사랑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향한 애틋한 증오로 이어지는가 하면, 한결 같은 증오가 오묘한 사랑을 낳게 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이야기하는 악연이라는 것도 오래도록 지속되다 보면 내 삶의 중요한 일부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평소에는 꼴도 보기 싫지만 막상 진짜 안 보이기 시작하면 뭔가 신경 쓰이고, 왠지 모르게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창작물 속 아치에너미 관계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배트맨'과 '조커'의 인연이 대표적인 예시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넌 날 완전하게 해.". <다크 나이트>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연인끼리 나누는 달콤한 대화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이는 극중 '조커'가 '배트맨'을 상대로 내뱉은 대사의 일부이다. 실제로 '배트맨'과 '조커'는 서로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끊임없이 대립하는 관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비로소 완전한 영웅과 악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선과 악을 향한 두 사람의 올곧은 신념이 서로에게 커다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두 캐릭터의 원전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DC 코믹스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조커'가 자신이 '배트맨' 없이는 한낱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나, '조커'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분명히 다시 빠져나와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며 '배트맨'이 그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드러내는 경우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서로를 미워하며 죽고 못 사는 두 사람의 관계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