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소비를 하면서 역사를 대하는 자세
앞선 글입니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한 나라로, 국민감정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다. 중국과 대만, 태국과 베트남처럼 인접한 국가는 군사적 충돌도 많았고 필연적으로 문화적 교류도 잦을 수밖에 없는, 애증의 관계다.
우리나라도 경술국치(庚戌國恥)라는 치욕으로부터 겨우 100년 남짓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 100년 동안 세상은 너무도 빠르게 변했다. 가깝기 때문에 문화,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재화 소비는 역사 인식이라는 하나의 시각만을 고집하는 것에서 벗어나 충분한 역사 공부와 팩트를 기반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개인의 선택에 따라 소비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나도 학창시절 J-POP을 좋아했다. 가사가 일본어라는 이유로 매국노, X바리라는 소리를 종종 들어왔다. 심지어 친한 친구로부터도.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선생님이 역사 시간에 "X바리놈들" "때려죽일 일본놈들" 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일본은 무조건 나쁜 것, 악이라는 원색적 표현이 많았다.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여 이런 결과를 가져왔고, 과거 역사 속에서 어떤 성찰을 할 수 있는지 에 대한 교육은 부족했던 것 같다. 설사 그런 내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역사적 팩트를 짚고 냉철히 판단하기보다 강렬한 단어와 표현으로 '일본 = 무조건 배척해야 할 대상', 조건반사처럼 주입식 입력이 된 탓일 것이다.
역사는 중립적으로, 객관적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라도 예외는 없다.
그게 1초만에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 시민으로써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베트남 전쟁에서의 학살은 학교에서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물론 이 부분은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고 마주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독일이 더욱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긍심을 가질 만한 것에는 자긍심을 가지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한다.
우리 민족과 역사는 완전 무결하고, 피해자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성립된다 - 이러한 인식 안에서는 '감히' 제이팝을 듣고 일본문화를 소비하는 이들에게 X바리, 매국노 라 비난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그들에겐 정의의 칼자루 정도 되겠다)이 주어진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한말 역사를 파고들듯이 공부를 했다. 역사를 원래 좋아하기도 했고, 매국노라는 무지성 비난에 '팩트를 가한 논리'로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말을 하는 '너'보다 나는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 역사책은 물론 일본입장에서 쓴 역사책도 읽어보고, 2차 대전 시기의 세계사를 찾아보기도 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보기도 하고.
그래서 당신은 역사를 얼마만큼 제대로 아는지? 그에 대한 본인의 주관과 생각은 어떠한지?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은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매국노'라 비난함으로써 자신은 고결한 '애국자'가 되고 나라를 팔아먹는 문화 소비러 앞에서 본인의 정당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나는 과거 피흘리며 독립을 쟁취해낸 독립투사들과 동급인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것 또한 알량한 우쭐함에서 나오는 표현이리라.
단면만 보고 매국노라 부르는 그들에게 애국심은, 개인의 정당성 실현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20년간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제이팝을 듣고 일본문화를 소비한다고 '매국노' 소리부터 나오는 사람은 되도록 멀리하는 편이다. 뒤늦게 농담이라고 해명해도 말이다. (요즘은 이런 사람들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최근 가수 성시경의 관련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성시경도 역사공부라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무지성 악플에 대응하고 있구나 싶어서. 일본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가 성시경만 있는 것도 아니고, K-POP이 점령한 시대에 세계 2위의 음반시장을 놓친다는 것은 경제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참고로 일본은 피지컬 음반이나 공연시장 규모는 우리나라의 2-3배 이상이다) 이젠 시대가 바뀌어 아이돌 그룹도 다국적 멤버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저런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단면밖에 보지 못하는 주입식 역사관의 폐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감히 국수주의라고 하기에도 너무 무지한 수준의 이야기다.
2022년 BTS의 빌보드 정상,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오징어게임의 대성공,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 임윤찬의 반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등 쾌거가 연달아 이어지면서 K-culture가 삼각 트라이앵글(음악/영화/드라마)을 달성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리고 20년 전, 그 시작점에는 보아의 일본 성공기가 있었다.
보아의 일본진출 초창기, 일본시장에 진출했고 한국활동을 거의 안한다는 이유만으로 매국노라 부르는 악플러들이 그때도 존재했다. (믿기지 않았겠지만 진짜다.;) 보아 스스로도 활동초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인터뷰가 기억난다.
일본진출 1년 만인 2002년, 세계 음반시장 2위의 일본 공인 음악차트인 오리콘 차트에서 <한국인 최초 1위>라는 대기록을 쓰고 금의환향한 그녀에게 '보아, 일본을 점령하다' '대한의 딸' 등 애국심을 고취하는 수식어가 무수히 장식되었다.
그녀의 2002년 히트 앨범 No.1의 포스터에는 태극마크가 들어가있기도 했다. 그만큼 보아의 일본시장 정복은 한국 문화콘텐츠사업에 있어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은 많은 한국가수들이 오리콘 1위를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 콘텐츠가 처음으로 세계시장을 뚫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오랜 팬이라 잘 알고 있다)
'보아, 일본을 먹다'라는 당시 주간지(2003년 5월호) 표지 타이틀도 있었는데 자극적이지만 동시에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 한을 해소해주는 타이틀이었다.
기사 내용의 '문화정벌', '승자의 입장에서'라는 코멘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의 오랜 근대사의 한이 한국 소녀가수의 음반차트 1위로 단숨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표지 타이틀도 어찌보면 '점령하다'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먹다'라는 일차원적이고 강렬한 동사를 선택함으로써 근대사 콤플렉스를 감정적으로 풀어낸 것 같기도 하다. (이 다음달 잡지 코멘트 독자란에 한 일본인 독자가 '먹다'라는 표현은 좀 불쾌하다라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보아의 성공으로 후발 주자들이 일본시장에 연착륙을 했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미국과 일본은 K-POP 아티스트에게 있어 반드시 거쳐야하는 커리어상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럼 문화소비를 할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째, 꾸준한 역사공부(관심)와
둘째, 감정은 빼고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 노력하는 자세 라 생각한다.
물론 문화의 기저에는 그 나라 고유의 뿌리깊은 생활양식, 가치관, 역사 등이 스며들어있기에 역사와 문화는 뗄레야 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공부를 해야된다는 것이다. 말이 거창해서 공부이지, 평소에 다큐나 관련 책, 유튜브 등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좋은 콘텐츠는 널렸다. 시각을 넓힐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 가수가 일본 활동을 하면 매국노, 한국 가수가 도쿄돔 입성을 하고 엔화를 벌어오는 것은 애국인가?
모두 같은 행동인데 잣대는 이중적이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의식이 없다면 시류에 휩쓸릴 수 밖에 없다.
역사를 마주하되 잘한 것과 못한 것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개인의 정당성을 위한 편협한 역사의식 뒤에 숨어 알량한 애국심으로 타인을 공격하지 말고, 건설적인 비판을 해야 한다. 맹목적인 '비난'이 아니라.
건강한 역사의식과 열린 사고는 상식과 같이 늘 지니고, 다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본인만의 주관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할 때, 내가 유리할 때만 꺼내쓰는 '선택적 애국'이 아니라.
여기에는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비단 일본문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를 소비할 때는 국수주의든 민족주의든 사대주의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사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너머에 훨씬 넓은 세상이 있는데, 편협한 사고에 갇혀있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자.
글로벌 시대, 역사에는 국경이 있지만 문화에는 국경이 없다.
한쪽의 정당성만 주장할 게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열린 시각으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1. 역사공부는 건강식품과 같은 것이다. 평소 꾸준히 건강식품을 챙겨먹듯이 관심을 갖고 본인만의 기준을 세우자.
2.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콘텐츠에는 극단적인 국수주의/사대주의는 지양하고, 콘텐츠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자.
3. 요즘같은 글로벌 시대에 세계시민다운 넓은 시각을 장착하면 내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4.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 같은 내로남불/이중잣대는 갖다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