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자기(self)를 지킨다는 것

by 주희진

융 심리학에서는 자아(ego)와 자기(self)를 구분한다. 자기는 개인 성격구조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립하여 이해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인간의 의식(ego)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충동적 욕구(libido)로 대표되었다면, 융의 무의식은 사회가 아닌 본인이 인식하는 자기(self)로서 본인을 나타내는 순수한 정수로서 대표되는 느낌이 있다. 융은 사회적 가면인 자아와 순수 본인인 자기가 완전히 일치화되고 조화되는 과정을 자아실현으로 보았고, 그 과정의 완성을 개인화(individualization)라고 명명했다. 이는 일종의 종교적 깨달음과 같이 인간이 이 경지에 오를 경우 삶이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20대 때 칼 융의 [인간과 상징]을 읽으며, 다소 비과학적 접근과 설명에 더불어 일종의 종교적 수행서와 같은 느낌이 풍겨 나옴에 감동하며 읽었던 책은 아니지만, 자아와 자기의 완전한 조화를 통해 삶을 완성시켜 나갈 수 있다는 방향성에는 크게 감화되었었다. 그때부터 나의 자기(myself)에 대해서 인식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 같고, 당시 자기를 탐구하는 것을 인생 전반의 장기적인 일개 과제로서 개념화 시켰다. 개인화를 완성함으로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종교적 수행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일단 정신적으로 건강한 개인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숙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아는 눈에 쉽게 보이고, 특히 남이 자주 평가해주는 나의 모습이지만, 자기는 내가 스스로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어쩌면 존재조차도 깨닫기 어려운 나의 모습일 수 있지 않은가. 자아와 자기의 조합이고 나발이고, 일단 자기를 아는 것이 우선과제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자기를 탐구하며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며 지적호기심을 채우는 나를 사랑했고, 영화를 보며 타인에 이입할 줄 아는 나를 사랑했으며, 고된 하루 끝에 가지는 저녁 식사와 맥주를 음미할 줄 아는 나를 사랑했으며, 이타심에 남을 돕는 나를 사랑했고, 새로운 경험 또는 과제에 거침없이 덤빌 줄 아는 나를 사랑했다. 특히 계속해서 자기를 확장하여 인식하려는 나의 노력을 사랑했다. 나는 새로운 취향을 탐구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고, 나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고양되곤 했었다.


쓰다보니 벌써부터 돌아갈 수 없는 어렸던 시절에 대한 찬가처럼 글이 변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서야 글의 요지를 밝혀보자면 슬슬 30대가 꺾여 오는 지금의 나는 예전 만큼 자기를 탐구하며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다가 아래의 비판문을 읽고 든 생각이다.


"시장적 성격 구조를 가진 사람은... (중략) ...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왜' 다른 방향이 아니라 이 방향으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물음에는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커다란 그리고 늘 변화하는 자아(ego)를 갖고 있지만 아무도 자기(self), 핵심, 정체성의 감각을 인식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 드리워진 '정체성의 위기'는, 구성원들이 저마다 '자기'가 없는 도구로 전락하고, 회사 '혹은 다른 거대한 관료제 조직'의 일원으로서만 자신을 증명함으로써 빚어진 것이다. 진정한 자기가 없는 곳에는 정체성도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시장적 성격"을 가진 사람에 대해 비판하며, 그들은 현대사회에서의 시장적 성공을 위해 자신들의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에만 집중한 나머지, 스스로를 상품화 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주변 사람과 최소한의 친밀감 마저 잃어버리게 되어 종국에는 자기(self)를 돌보는 데에도 실패한, 즉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는 "소외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다고 하였다.


물질만능주의에 잡아 먹혀 휴머니즘을 외면한 채 허영만을 쫓는 사람들을 비판하곤 했었다. 그들은 결국 자기(self)가 뿌리 내리지 못한, 자아(ego)만이 팽창하여 비대한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며 나름의 쓴소리를 내뱉으며 배격하곤 하였다.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전하지만, 오늘 에리히 프롬을 읽으며 문득 나는 자기를 얼마나 돌보고 챙기고 있는지, 과거의 나에 비해 나 또한 시장적 성격 구조를 가진 사람 중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새롭게 발견하겠다며 무언가를 새롭게 탐구해본지가 참 오래된 것 같다. 우선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20대의 나는 커리어 개발 방향에도 자기 인식을 녹여냈다. 나는 사교적이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을 만나며 역동적으로 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외국계 회사에서 영업직 커리어를 발전시켜왔다. 커리어가 어느 정도의 안정권에 들어 왔다고 생각되는 지금은, 나는 일에서 그 너머의 자기 탐구와 커리어 발전 방향을 고민해본 바가 없는 것 같다. 그냥 적당한 월급에 만족하며, 회사에서 적당한 수준의 자기 관철, 타협, 굴복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퇴근 후에 달콤한 월급을 소비하는 삶에 안주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나의 모습도 사라졌다. 모든 새로운 경험에 쉽게 고양감을 느끼곤 하던 나는 항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을 즐겼었는데, 어느새 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귀 기울이는 것에 피곤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나마 갖고 있던 취미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영화도 예전 처럼 그렇게 자주 보지 않으며, 책을 읽더라도 앉아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고,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과식과 음주만이 나의 "가장 강한 지속력을 가진 취미(?)"가 되어가고 있다. 빌어 먹을 숏폼 비디오를 보는 데에 하루 1-2시간을 쓰는 것 같다. 보는 중간 뇌가 팝콘처럼 튀겨지고 있는 것을 느낌에도 멈출 수가 없다. 밀리의 서재를 터치하는 것 보다 유튜브를 터치하는 것이 쉽다. 적당히 일하고 퇴근 후 과식과 음주, 숏폼 비디오에 둘러 쌓인 나의 하루에 자기(self)는 없다. 그나마 어릴적 부터 게으름을 원죄처럼 느끼고 독서를 구원처럼 느껴왔기에, 도파민에 휩쌓인 하루를 보내다 보면 후회감에 책을 짧은 시간이라도 읽는 것이 습관이라 숨을 쉬는 것 같다. 도파민은 정말 정말 위험하다.


오늘 에리히 프롬의 비판이 굉장히 시기적절하게 다가왔다. 시장적 성격의 사람을 그렇게 비판하던 내가, 나이 들어가며 그들 중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30대의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조금 더 격렬하게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브런치에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오랜만에 글을 써보기도 한다. 눈이 다소 질퍽하게 내려 걷기 힘든 하루지만, 새해의 마지막 무렵을 걸으며 여러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 새해 복 많이들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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