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하면서 느낀 감정
혼자 자취한 지 2년이 지났다. 처음 자취방에 들어섰을 때, 그 공간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잠이 가장 잘 오는 곳은 내 방이 아닌, 사람 없는 지하철 의자 한 칸이었다. 집에만 오면 쉬지를 못했다. 해야 할 집안일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그 일들을 마주할 생각에 마음은 늘 무거웠다.
지하철에서 잠이 잘 오는 이유는, 반복되는 일정한 진동과 저주파 소리가 태아 시절 자궁 안의 환경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좁고 밀폐된 구조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특히 사람이 없거나 조용한 시간대의 지하철은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는 공간이 된다.
반면 집은 나에게 애증의 공간이다. 분명 나의 안식처이며 오롯이 내 몫의 공간이지만, 완전히 나를 쉬게 해주지는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쫓기듯이 자취를 시작하자마자 대출을 받아 가구를 들이기 시작했다. 이층 침대, 넓은 책상, 편안한 의자, 내게 꼭 맞는 컴퓨터. 하지만 집이 애증의 공간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릴 적, 집에서 울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울면 더 맞았으니까.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나는 잘못을 해서 아버지에게 맞았다.
어린 나에게 집이란,
“울면 안 돼.”
“알아서 해야 해.”
그런 말들이 나를 둘러싼 공간이었다. 감정은 숨기고, 혼자 해결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참는 사람이 되었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잃어버렸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나는 집을 ‘완벽한 나만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온 만큼, 힘들었던 나에게 보상이 필요했다. 나는 가구 하나하나를 직접 고르고, 조명, 색감, 배치까지 신경 쓰며 안정감을 찾았다.
그 완벽주의 덕분에 내 공간은 예뻐졌고, 나름 만족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완벽은 점점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집은 영원히 만족되지 않는, 나만의 작은 감옥이 되어버렸다.
“이게 아니야.”
그러고는 다시, 또 다시 집안일을 하지만 만족하는 법을 몰랐다.
쓸고 닦고 정리하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작은 문제 하나하나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정리를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나는 청소를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점점 청소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집 안에 쓰레기를 쌓아두고, 그걸 방어막처럼 삼았다. 지저분한 집이 나를 숨겨주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문득, 친한 친구에게 내 집을 보여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더럽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그날 나는 정말 열심히 청소를 했다. 나 자신이 숨 쉬기 위해서.
청소를 끝내고 나니 상쾌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초라하게 만들었을까?
끊임없이 달려가며 쉬지도 않고 가는 내 모습이, 마치 ‘잘 살아내야 한다’, ‘증명해야 한다’는 명령을 따르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조금만, 스스로를 상냥하게 대해주자. 오늘 하루, 이 말을 나 자신에게 전한다.
“그동안 고생했어. 넌 충분히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