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7
최근 제주도를 다녀왔어요. 제주도가 당연히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눈보라가 휘몰아치더군요. 원래는 자연을 느끼는 여행을 계획했지만, 그 계획은 자연스럽게 바뀌었어요. 대신 골목 이곳저곳의 책방을 찾아다녔죠. 저는 책방은 시내 한복판보다 골목, 한적한 곳에 숨어 있어야 훨씬 낭만적이라고 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주에 가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조용한 장소에 책방들이 숨어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책방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북적이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주 책방 이야기는, 며칠 더 묵혀 두었다가 다음에 천천히 꺼내볼까 해요.)
그렇게 작은 독립서점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아니 어쩌면 필연처럼 ‘시크릿 북’을 만났죠. 이름도 저자도 감춰진 채 포장된 책들이 책방 한켠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서점은 어떠한 설명조차 없이 포장된 책만 내놓고, 어떤 곳은 옆에 짧은 문구를 더해 고를 수 있게 해두기도 했어요. 설명이 없는 곳에선 눈에 처음 들어온 책을, 설명이 달려 있는 곳에선 하나하나 꼼꼼히 읽으며 고민했습니다. 선물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죠. 친구가 좋아할 것 같은 문구를 더듬으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해보는 시간도 즐거웠어요.
사실 저는 원래도 책방에서 시크릿 북을 보면 꼭 하나쯤은 사는 버릇이 있어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제게로 다가온 책 한 권이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한 미지의 책이라면, 그 마음은 더 짙어져요. 사실 우리는 책을 고를 때 제목이나 표지만 보고서 골라야 하잖아요. 마지막 장을 덮기 전까진 그 책이 나와 맞을지 알기 어렵죠. 그런 점에서 모든 책 고르기는 이미 ‘랜덤’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을 고르기 전 괜히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해요. 그런데 시크릿 북은, 그 복잡한 생각을 단숨에 덜어줍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제 앞에 놓인 책 한 권을, 오직 ‘이끌림’만으로 선택하는 거죠. 판단의 주도권을 제 이성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운명 같은 힘에 맡깁니다. 그리고 그 힘은 제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줍니다. 책을 고르는 짜릿함, 포장지를 찢을 때 느껴지는 설렘, 그 안에 감춰진 세계를 처음 마주하는 이 모든 과정이 제게 작은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책을 다 읽고 나서 “아, 내 스타일이 아니었네” 싶은 경우도 있지만, 그 또한 시크릿 북만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만남은 책 한 권 그 자체로 추억이 되고, 가끔은 삶의 작은 선택과 우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도 하니까요.
책방에서 시크릿 북을 발견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하나쯤 골라보세요. 생각보다 오래오래 기억 속에 남는, 특별한 만남이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