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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스키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챕터 곤드레

by 메론

기대하는 바 마음이 전해져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들은 세상에 거의 없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일터에서는 물론이고 우리 육아공동체와 가정에서도 그러하다. 특히 첫 딸 단우를 통해 한껏 겪으며 더 깊게 깨닫게 된 것 같다. 아, 나의 아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길로 자라나는구나. 왜 아이는 나의 기대와 늘 다르게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것을 온몸으로 깨닫기까지 겪었던 어려움을 위로받는데 내가 애써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아주 작게나마 나의 기대에 꼭 맞게 하는 것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다행히 그러한 것을 찾았는데,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다.



부나하벤 12년


내가 집에서 아이가 잠든 깊은 밤에 홀로 위스키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일터의 동료가 있었다. 그는 그것이 주는 위로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위스키가 주는 감각에 대해 나보다 더욱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단우가 두 돌을 지나던 시점이었다. 가정보육을 고수하던 아내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오롯이 떠안아 대신 짊어질 수 없기에 이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괴로움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때 그가 어느 날 문득 이 위스키를 한 병 선사하였는데, 싱글몰트의 캐릭터를 가지면서도 피트 특성이 거의 없이 제법 부드러워 내 입맛에 맞을 거라는 거다. 한 때 위스키 애호가들 중에서 소위 피트라는 싱글몰트 위스키의 독특한 풍미를 즐기는 것이 내공의 깊이와 같은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 풍미는 쓰고 맵고 탁한 느낌을 포함하는 남성적이고 강렬한 것으로, 누군가는 ‘치과에 온 느낌’ 같은 과학적인 표현마저 하기도 하던데. 나도 아이를 갖기 전에는 이러한 풍미를 즐길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피트가 강한 위스키는 내가 힘든 상황에 더욱 스스로를 혼내고 다그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아이를 기르면서 마시는 위스키는 남성적인 특성을 갖지만 그러나 너무 강하지 않게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 위스키는 내 위스키 취향을 더 확실하게 알게 해 주었다. 알싸한 느낌이지만 피트에 그것까지는 넘어가지 않고 절제하며 바로 달콤함으로 이어진다. 특히 약간의 물을 섞어 부드럽게 만든다면 더욱 빠르게 절제하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 위스키는 내가 힘들 때, 위로보다는 나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적절한 조언을 강하지 않은 어조로 담백하게 듣는 것과 같다. 첫째 아이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와 아내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깊은 밤에 적절한 위스키다.


늘 마음을 다잡고 지키고 견디는 것이 중요하기에 부나하벤 12는 내 일상에 빠지지 않도록 3년을 넘게 여러 병 이어서 즐기고 있다. 늘 한결같이 담백하고 적절한 조언과 함께 곁에 있어주는 친구 같은 느낌을 주는 위스키. 강인한 마음으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늘 갖고 있지만, 잠깐 한숨 돌리고 싶어지는 피곤한 때가 있다. 그런 시간 속 육아 동지들에게 말없이 한 잔 권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위스키이다.



부쉬밀 블랙부쉬


3년의 가정보육 끝에 우리 가정은 덩더쿵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단우의 입소를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전적으로 아내에 의한 것이었다. 왜 나면 나는 그 당시 ‘공동육아’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아내는 단우를 키우는 것에 당신 모든 것을 다 바치듯 전념을 다했기 때문에, 그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내의 그 결정은 사뭇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음 나누기’라는 면담 절차도 거쳐야 했으며 나는 이 과정을 마치 내가 새로운 일자리에 지원하는 지원자와 같이 스크리닝 과정으로 이해하고 비교적 덤덤한 마음으로 치러냈지만 아내는 입소의 모든 과정에 진심을 담아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단우의 입소 승인 소식을 듣게 된 아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단우 덩더쿵 가게 됐어’라고 하며 엉엉 우는데, 내가 참으로 흥미로워 껄껄 웃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때는 내가 이 결정과 변화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단우의 덩더쿵 입소 후 공동육아에 젖어들며 단우, 아내, 나, 우리 가정 모두의 변화를 체감하게 되었다. 길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같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바다를 건너 새로운 세상에 상륙한 것과 같았다. 다른 친구들보다 첫 아이를 일찍 출산한 우리 가정은 마치 기존 관계 속에서는 이방인과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두가 아이를 기르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양식에 익숙하였고, 이것이 아이를 기르며 나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공식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어느 평범한 주말도 덩더쿵을 이루는 조합 가정들과 점차 자주 보내게 되었다. 아내와 참으로 좋아하여 단우를 갖기 전 종종 갔었던 캠핑도 단우를 데리고 다른 조합들과 함께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위스키는 포근한 모닥불 곁과 같은 느낌을 준다. 풍미도 그러할뿐더러, 아마 내가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캠핑을 떠난 어느 밤 모닥불 곁에서 포근하게 마셨던 것이 이 위스키와의 첫 만남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리쉬 위스키는 증류를 3회에 걸쳐하는 것이 전통으로 알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스카치위스키 대비 전반적인 맛과 향의 강도가 낮아지면서 부드럽고 순수한 특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부시밀 블랙부시는 순수한 아이리쉬 위스키를 쉐리 캐스크에 넣어 숙성시켜서 아이리쉬 위스키의 크림과 같이 부드러운 특성과 복잡하지 않은 순수함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나무 향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고요하고 깊은 여름밤 어느 숲 속에서의 캠핑 중 모닥불 곁에서 같은 육아 여정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편안한 마음으로 나누어 먹기에 딱 좋은 위스키이다.


때와 상황은 변해도 위스키는 늘 한결같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과 매일 빠르게 바뀌는 우리 주변의 일상 속에서 늘 일관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위스키가 좋은 균형을 이루어낸다. 그리고 위스키마다 고유의 풍미가 그 위스키를 마시던 순간순간의 기억을 순식간에 되살린다. 오늘 밤은 오랜만에 이 두 술을 마셔본다. 부나하벤 12년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단우와 힘들었던 가정보육의 순간들이 향으로 알싸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이 위스키가 그 시간들을 살아내는데 함께했었지. 그때 아내와 나 모두 어렸고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부쉬밀 블랙부쉬를 마셔본다. 아, 지금 공동육아 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지금에 참으로 감사하다.


by 곤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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