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이 왜 영어 선생님이 됐어요?” 올해 또 만나서 좋다는 말 같은데, 단풍 지는 마당에 새삼스럽게 뭘. “너네 보고 싶어서 따라왔지.” 실제 학년 배정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이럴 땐 뻔뻔할수록 좋다.
나에겐 일이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예민한 성격 탓에 일희일비의 진폭이 크다. 기쁜 일에는 천국이 따로 없게 행복하고 슬픈 일에는 땅속 깊이 우울했다. 학교생활도 그랬다. 일과 삶을 분리하라고들 하지만, 맘처럼 쉽진 않았다. 아이들과의 일은 그날의 기분에 착 들러붙어, 요가를 하다가도 생각이 나고 새벽에 꿈까지 따라온다.
어떤 날에는 아이들이 사랑스러워서 주정에 가까운 일기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가족과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역시, 행복에 취하기가 무섭게 다음날이면 속을 썩이는 아이들. 이것이 숙취인가.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단호한 교사의 얼굴을 썼다가, 얼마 안 가서 가면이 벗겨진다. 그러길 1년 반복하면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된다.
종업식날 눈물이 터진 건 작년이 처음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015B의 이젠 안녕, 그 뻔하디뻔한 가사에 사계절 추억을 담았다. 함께 영상을 보는데 그동안 아이들에게 고마웠던 마음이 북받쳤다. 당연했던 하루하루가 이제는 끝나는구나. 불 꺼진 교실 끄트머리에서 슬며시 눈물을 훔쳤다. 몇몇이 덩달아 울어줘서 마지막까지 고마웠다.
나의 2021년에서 아이들을 빼면 뭐가 남을까. 그땐 7시 30분쯤 교실에 왔다. 요즘같이 간당간당 지각하느라 눈치 보는 나로선 상상 못 할 열정이다. 수업 준비를 하고 있으면 몇몇 아이들이 유난히 일찍 등교했는데, 가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다정한 대화를 나누면 하루의 시작이 산뜻했다. 8시 40분쯤 본격적인 일과가 펼쳐지고, 그때부터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약 다섯 시간 동안 스물대여섯 명의 역동이 만드는 에너지에 덩달아 한 몸 불태우고, 넋이 나간다.
방과 후에도 청소 특공대를 자처하는 아이들을 말리지 못하고, 매일 같이 쓸고 닦고 먹고 웃으며, 놀이인지 청소인지 모를 이상한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이벤트를 열어서 삼삼오오 원데이클래스와 보드게임 파티로 추억을 더하고, 소수 정예로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 애정의 농도가 진해진 것 같다.
아이들의 존재는 그해 나의 하루를, 일기장과 사진첩을 가득 채웠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연료가 되었다. 화나거나 지쳤던 기억은 다행히 휘발성이 강하고, 유한한 시간은 지긋지긋한 일상마저 애틋하게 정제한다. 1번부터 27번까지 아이들 이름마다 따뜻한 장면만 남아있다. 진심을 준 것 이상으로 받았고, 맘 편히 사랑할 수 있었다.
<아무튼, 메모>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의 삶은 결국 평생에 걸친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될 것이다. 어떤 곳이 밝고 찬란하다면 그 안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빛을 따라 더 멀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의 교직 인생이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된다면, 작년의 빛은 앞으로 교사의 일을 지속하는 힘이 되어줄 것 같다.
한 명 한 명 안아주며 떠나보냈던 아이들을 올해 영어 시간에 만나고 있다. 저마다 새로운 반에서 친구를 사귀고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별생각이 다 든다. 한집 살다가 독립한 자녀를 오랜만에 만날 때 이런 기분일까. 아니면 연인이었다가 친구로 쿨하게 지내는 느낌이 비슷할까. 어떤 아이는 그 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서, 표정이 편안해 보여서 마음이 놓이고, 또 어떤 아이들은 참 여전하다 싶어서 재밌다. 한때 청소 특공대였던 여자아이가 그 반의 괜찮은 남자아이와 툴툴대는 말을 주고받는데,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주책이 발동된다. 올해 새로 만난 아이들이 흥미진진한 워터파크라면, 또 보는 아이들은 뜨뜻한 찜질방 같다.
2학기도 거의 지났다. 이 학교에 있는 시간이 몇 달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또 달라진다. 오죽하면 이런 글을 쓰게 됐을까. 그래놓고 다음 주에 출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쿨한 척 수업하겠지. 아니, 쿨하고 싶지 않다. 후회 없이 사랑하고 싶다.
물론 우리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고, 서로 자연스레 잊힐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아이들 평생의 요약본에 지금 이 시절이 들어간다면, 찬란한 빛까지는 아니더라도 따뜻한 온점으로 남고 싶다. 그다음 문장, 다음다음 문장이 끝없이 사랑으로 이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