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지내요…
작디 작은 피로들과 적당한긴장감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순간 뒤섞여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데
그날은 커피향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문득
‘도망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일상에서 한발짝만 떨어지고 싶었다
아니,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멀리…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당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래, 도망치자.
아이를 학교에 태워주러 가는 길에 차를 돌렸다
담임선생님과 통화를 하고
그대로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어디까지 갈것인지
목표도, 계획도 없었다
그냥… 그냥 떠났다
운전을 하며 음악도 틀지 않았다
고요한 차 안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일상에서 멀어져, 다른 세계로 가는 소리..
나의 일상은 늘 같지는 않지만
별 다르지 않은 하루의 연속이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연다.
커피를 내리고 조용히 몸을 깨우며
집안일을 해 나간다.
하나둘씩 가족들이 일어나면
아이들을 챙기고 부모님을 돕고
남편의 하루를 살핀다
그 후에야 나의 짧지만 소중한 자유시간을 즐긴다
장을 보거나, 책을 읽는다.
운이 좋을 땐 잠깐의 낮잠을 즐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땐,
누군가와 만나 차한잔을 나누기도 한다.
오후엔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을 챙기고
해가 지면 가게로 출근해 하루의 남은 힘을 다 쓴다
깊은 밤이 되서야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닫는다
이렇게 매일, 하루하루를
비워둘 틈없는 시간들로 보낸다
나는 이것을 일상이라 부르고
그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간만에 만난 사람이
무심히 “잘 지내요?”라고 물어오면
나는 이상하게 멈칫하게 된다.
‘잘지내요…
정말 나는 잘 지내고 있었나.
잘 지낸다는 건 뭘까.’
예전의 나는
행복한 일들이 자주 생기고
기분 좋은 일들만 만드는 것이
‘잘 지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평범하고 잔잔한 하루는
그저 흘러가는 하루였고,
그건 ‘잘’ 지낸다는 것과는 달랐다.
슬프거나 힘든 날이면
마치 잘 못지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처럼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게 당연했고
거기에 작은 핑계도 더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의 ‘잘 지낸다’는
조금 달랐다.
행복과 불행의 수를 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날이 오더라도
내 일상을 놓지 않고 지켜내는 일—
오늘의 일을 해내고
챙길 것들을 챙기고
무사히 하루를 닫는 것이
진짜 ‘잘 지내는 것’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나는 내가 존재하는 걸 지키는 게 아니라
버티며 하루를 안간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서서히 마음에 들어앉았다.
왜 이렇게까지 버텨야 하나…
그 질문이 들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도착한 곳은
강원도 평창.
20년 전 처음 가본 그곳은
나에게 ‘잠’을 허락 해준 곳이었다.
불면증으로 지쳐있을 때,
우연히 찾은 그곳에서
나는 오랜만에 깊은잠을 잤다
그래서 늘 휴가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
계획도 목적도 없이 찾은 오늘도
결국 내가 도착한 곳은 평창 이었다.
나는 … 쉬고 싶었던 걸까…
붉은 단풍과 초록초록한 침엽수가
오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답고 높은 산을 마주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곳의 아름다움과 맑은 공기로
온 몸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차를 세우고, 아이와 손을 잡고 숲을 걸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 숨이, 그 걸음들이
묘하게 나를 살리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달려 강릉에 도착했다
바다가 보였다.
파도 소리가
온몸에 붙어 있던 긴장을
하나씩 떼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
그저 그것을 보는 만으로도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
긴 시간의 운전으로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어느새 잔잔한 행복으로 가득 찼다
버티며 살아내는 것도 잘 지내는 일이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 역시
일상을 잘 지내게 해주는
또 하나의 사랑일지 모른다.
도망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망칠 때를 알아채는 것.
버티지 않고,
애쓰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조금씩 찾아오길 바라며—
나는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