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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유 Dec 22. 2022

심연인 줄도 모르고

  시한부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끝이 나버릴 그런 일이었다. 이제 막 봄의 문 턱에 들어섰으니 싱그런 계절을 하나 보내고 나면 되는 일이었다. 감기처럼 온 대지가 뜨거운 입김을 내뿜을 때쯤이면 안개처럼 온데 간데없이 사라질 터였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이내 흩어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오히려 사그라들 줄 몰랐다. 100년 만에 찾아온 팬데믹이라 했다. 연일 TV에서는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들의 분주한 모습과 급격히 증가하는 숫자들로 도배되었다. 그렇게 복직도 연말로 미루어졌다.


  일 할 수 없음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끝이 눈에 보였으니까. 그때까지 하고 싶었던 일을 실컷 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처음은 미국 여행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 가이드를 하는 지인을 방문해서 일을 도우며 지내기로 했다. 라스베가스에 도착한 당일부터 그랜드캐니언 투어를 떠났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어마무시한 대자연의 경관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 한 달 내내 돌아볼 생각에 설렘이 가득했더랬다. 하루를 쉬고 그 다음날에도 그랜드캐니언 투어를 다녀왔다. 두 번째인데도 처음과 다름없이 온통 멋진 풍광이 가득했다. 광활하고 장엄한 풍경을 보노라니 꿈만 같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갑자기 라스베가스를 비롯 미국 전역에 락다운 소식이 전해졌다. 예정되었던 투어들이 모두 취소됐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한국보다 나아 보였던 미국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미국 정부에서 쉬쉬하느라 괜찮아 보였던 것뿐이었다. 족히 수십 번은 갈거라 생각해서 그림 같은 풍경을 뒤에 두고 내 사진 하나 못 찍었는데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근 한 달을 안에 갇혀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나를 반겨주었던 건 자가격리 2주였다. 아니 미국에서도 격리하다가 왔는데 다시 2주 동안 격리라니요??? 해외에서 입국한 모두는 무조건 자가격리행이었다. 2주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 유튜버가 되기로 했다. 소재는 우리집 고양이었다. 마침 미국 격리생활 중에 홀로 익힌 동영상 편집 기술을 보유중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데 우리집 고양이들은 공교롭게도 둘 다 귀요미였다. 내가 유튜브를 시작하기만 한다면 100만 유튜버가 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우리집 유튜브 꿈나무는 자가격리라는 시련 속에서도 싹을 틔워냈고 세기의 역작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골드버튼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였는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시대를 너무나 앞서간 나머지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도 대중들의 클릭도 모두 모두 외면당하고 말았다. 자가격리가 끝나자 우리집 유튜버는 골드버튼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며 유튜버로서의 삶도 마감했다.


  복직이 기다리는 겨울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제과, 제빵을 배워보기로 했다. 3개월 남짓한 과정이었다. 평소에도 요리하는 것을 즐겼던 터라 빵을 만드는 게 참 즐거웠다. 새하얀 밀가루에 투명한 물과 짭짤한 소금, 달달한 설탕을 넣고 풍미 가득한 버터를 추가한 다음 반죽을 했다. 다음은 발효를 할 차례다. (발효를 생략한다면 그건 제과라고 보면 된다. 제과와 제빵은 발효의 유무로 나뉜다.) 따닷한 발효실에서 습식 사우나를 마친 반죽은 어느새 띵띵 불어나 있었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갖가지 모양으로 성형을 한다. 때때로 맛나는 소를 넣어 다채로운 맛을 내기도 한다. 그 다음은 뜨거운 오븐행이다. 적당한 온도와 시간을 맞춘 후 기다리기만 하면 짜자잔~! 하고 맛나는 빵이 뜨끈뜨끈하게 완성된다. 갓 구운 빵을 혹시 먹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도 직접 자신이 만든 빵을 말이다. 빵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나도 모르게 동그랗게(맞다, 네모나게 눈을 뜨는 사람은 없다) 큰 눈이 되어버리고야 만다. 사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던 사람조차도 단 한 입만 먹으려 큰 결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빵 3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은결의 마술쇼를 보지 않아도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보고도 믿지 못할 빵이 사라지는 마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3개월의 마술 같은 시간을 보낸 끝에 애플파이 정도는 가볍게 구워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제과기능사와 제빵기능사 자격을 갖게 된 건 덤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어느덧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이제 곧 복직이었다. 짧지 않은 휴직이었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휴가로 여기고 재밌는 시간들을 보냈다.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할 때였다. 회사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해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차가운 공기는 점점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으로 변해갔다. 온몸이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아니 얼어붙은 건 마음이었다.


  잔잔한 물가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낸 줄만 알았다.


  그게 끝을 모르는 심연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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