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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 Feb 08. 2019

강원도 동해안 로드 트립

양양-속초-고성-양양

운전을 시작하고 9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 드디어 혼자 차를 몰고 여행을 떠날 일이 생겼다. 이상하게 여름의 양양에 파도 소식이 계속 있었고, 애인은 다른 일에 묶여있었다. 사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시 운전을 시작해야겠다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도 서핑을 다닐 때 기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를 혼자 타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지만 넘실대는 꿀 파도를 떠올리며 첫 로드 트립(!)에 도전했다.

스무 살, 미국에서 처음 운전을 배우고 면허를 땄다. 초보도 어려울 것 없던 광활한 거리와 주차장, 여유로웠던 도로 사정은 한국에 돌아오니 완전 딴판이었다. 무법천지 속 뒤차가 원인 모를 클락션을 울리고, 버스 뒤 차선을 못 바꿔 정류장마다 서는 통에 내가 운전을 하는 건지, 버스를 탄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설상가상 그러다 사고까지 난 이후로 운전은 내 인생의 목록에서 삭제된 지 오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몇 번의 몽롱한 운전 연수 끝에 차를 사기로 맘을 먹었다. 차를 사면 운전이 는다는 주변의 말이 정말 맞았다. 주차장 기둥과 홀로 싸우며 헤매기도 했지만, 조금씩 운전과 친숙해져 갔다. 비장함 가득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타고 양양에 도착하니 큰 미션 하나를 통과한 기분이었다. 혼자 세계 곳곳을 누볐는데 운전해서 이 정도쯤이야. 그냥 서울로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어디를 가야 하나. 강릉은 가본 적이 없고, 몇 년 전 가본 적 있는 속초가 만만했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얼마 멀지도 않다. 그날 잘 곳을 그날 찾는 건 이미 익숙하다. 차 안에서 잠깐 검색 후 숙소를 예약하고, 즉흥적인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이런 걸 찍을 여유가 있었다니


서핑과 태양에 지쳐선지 첫날의 숙소에서는 기절했다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숙소 옆 청대산이란 산이 있길래 생전 안 하던 등산이란 것도 해봤다. 야트막하다고 해서 조리 신고 가볍게 올랐는데 땀범벅이 돼서 정상에 도착했다.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메뚜기 탓에 혼비백산되어 풍경을 감상할 틈이 없었는데, 꼭대기 정자 그늘에서 한숨 돌리고 나니 속초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울산 바위와 고속도로, 항구들, 그리고 하늘과 분간되지 않는 바다까지. 인간은 하늘에 갈 수 없어 바다에 간다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풍경을 보는 순간, 그 글이 떠올랐다.



마침 일요일이라 어제 청초호 옆을 지나가며 봐 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인자한 목사님도 좋은 인상으로 남았지만 설교 화면에 띄워진 설악산과 십자가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다. 그러고 보니 속초 면적의 절반이 설악산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산도, 바다도, 호수도 다 가진 속초, 대체 뭐지... 예배 후 근처 '칠성조선소' 카페에 갔는데, 야외에 앉으니 또 호수가 펼쳐진다. 할아버지 때 시작된 조선소를 3대 부부가 카페로 개조한 곳이었는데, 건물 자체의 아우라도 있었지만 너른 마당과 이어진 호수의 뷰가 압도적이었다. 일상에 자연이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뭔가 얼떨떨하다.

운전을 하고, 거리를 걷거나 뒷산을 오르고, 밤 산책을 하고, 카페에 앉아있는 내내 속초는 자연의 아름다운 표정들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웅장한 산과 바다, 평온한 호수들 사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빌딩 숲에 갇혀 살던 나는 그 풍경이 너무 어색하고, 너무 질투 나고, 또 너무 좋아서 혼자 감탄을 거듭했다.



속초에서 매력적인 것이 자연뿐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서울의 한 구 인구가 최소 13만(중구)에서 최대 67만(송파구)까지 되는 걸 감안하면 인구 8만의 속초는 한참 소도시임에도 대를 잇는 대표 서점이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의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콘텐츠를 제공하고, 한 자리에서 문화를 만들어 온 서점의 존재는 도시의 품격을 말해준다. 3대째 이어진 '동아서점'의 이야기는 여러 매체에서 익히 들어왔지만 방문해보니 더 멋진 곳이었다. 내가 갔을 때는 나이 지긋한 사장님(2대)과 며느리(3대)가 아기(아마도 4대?)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익숙하게 깔린 베스트셀러 책뿐 아니라 독립 서적, 잡지, 아이들 책이 골고루 진열되어 있었고, 속초를 다루거나 속초가 배경, 혹은 작가의 고향이 속초인 책들을 모아두기도 했다. 어떤 주제나 특정 작가로 큐레이션 되어 있기도 해서 얼마나 고심하며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속초 터미널 근처, 독립 서점과 게스트하우스가 같이 운영되는 '완벽한 날들'에서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예전 서점을 들렸을 때 숙소가 궁금하던 차여서 예약을 했는데, 혼자 묵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2층 침대였지만 편안하고 쾌적했고, 아담한 규모에 혼자 여행하는 여성분들이 대부분이라 차분한 분위기였다. 게스트하우스 내에도 소량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어 책을 보다 잠들 수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일어나서는 토스트 하나를 먹고, 서점으로 내려와 커피 한 잔에 느긋이 책을 읽었다. 여행지에서는 실용서나 자기 계발서보다는 에세이나 언젠가 읽으려 벼루던 책을 고르게 된다. 각각의 서점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윌리엄 피네건의 '바바리안 데이즈'를 골랐다. 맥주 하나를 들고 해변에서 책을 읽었던 시간은 그 날을 완벽한 날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바다에 가서 책을 읽고 싶어 속초 해수욕장을 향했는데, 여름 피서객들로 붐벼 주차에 애를 먹었다. 한참을 돌다 겨우 주차를 하고 해변을 갔는데 바다에서 뭔지 모를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거대한 기계들이 바다에 떠있는 모습이 너무 기괴해서 다른 해변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떤 변수에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건 로드 트립의 큰 매력인 것 같다. 조금 더 북쪽으로 이동해 고성 천진 해변에 도착했다. 작은 바닷가 시골 마을의 분위기였지만 튜브를 하나씩 끼고 몰려든 피서객들이 바다를 차지한 건 마찬가지다.

출출해져 '무미일'이란 분식집을 찾았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하고 심상치 않은 포스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서울보다는 북한과 훨씬 가까운 이곳에 연남동 어느 식당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은 감성의 공간이 있다니! 라탄과 원목 가구들, 빈티지한 조명과 소품들까지 세심히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양양 죽도 해변은 서울이나 호주에 살던 서퍼들이 정착하면서 차린 펍이나 음식점, 카페들로 작은 어촌 마을이 이국적인 서프 타운으로 변모했는데 이 분위기가 강원도 곳곳으로 퍼지고 있는 느낌이다. 다른 곳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그들이 즐기는 라이프스타일, 취향이 담긴 공간을 오픈하고, 그 감성을 공유하는 또 다른 이들이 그 지역과 공간을 찾으면서 새로운 물결이 만들어지는 거다. 속초의 칠성조선소나 완벽한 날들, 고성의 테일 커피 같은 곳들이 생기고, 인스타그램에서 그를 본 사람들이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실제로 찾아가고 다시 바이럴을 퍼뜨리면서 재미난 지형도가 그려지고 있다. 내친김에 다시 양양 설악해변으로 내려와 카페 맴맴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구옥을 개조한 작은 카페에 역시 인스타그램을 보고 온 듯한 몇몇이 연신 사진을 찍어대고 있다.



얼떨결에 시작한 속초 여행이 차로 다닌 덕분에 고성, 양양까지 오다닌 강원도 로드트립이 되어버렸다. 비록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쥔 초짜 드라이버였지만 강원도에 어떤 변화가 태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흥미진진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로 고성 땅값이 들썩였다지만 실제로 강원도 곳곳에 재미난 곳들이 생기고 있고, 제주처럼 이주민들이 주도하는, 조금 다른 라이프스타일과 커뮤니티들이 만들어지는지는 또 다른 국면이다. 물론 이 선구자들 덕에 작은 마을에 활기가 돌고, 결국은 부동산 임대료가 치솟아 원주민과 이 분위기를 형성했던 사람들이 내쫓기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그늘이 드리워질 테지만, 아직은 청년들이 지역에 입히는 새로운 기운이 더 힘이 세다고 느껴진다.

강원도 동해안 지역은 축복받은 자연환경 임에 틀림없지만 여행지로서는 아직 발전할 부분이 무궁무진한 것 같다. 한 지역에서 먹고, 자고, 마시고, 느끼는 모든 과정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있고, 취향에 맞는 곳들을 찾을 수 있을 때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젊은 층의 감성, 소비 패턴을 충족시키는 여러 인프라들이 갖춰지고, 로컬의 전통과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버무려지면서 도시의 생명 역시 연장되리라 생각한다. 이번 여행은 즉흥적이었지만 속초나 동해안 도시들이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바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일단 나는 조만간 다시 찾아 그 매력을 느끼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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