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바닷가에 살고 싶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 바다였고, 그 투명한 물 앞에선 온전히 내 모습 그대로 자유롭고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서핑을 시작하고 나선 바다를 그리워하는 증상이 매우 심각해졌다. 일단 수영을 못해 바라만 보던 그 바다에서 보드 위 떠 있고, 파도를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핑은 내 마음을 단번에 흔들었다. 사무실에서도 서핑 스팟을 비추는 카메라를 보며 바다에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도시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마음속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지금껏 고층 빌딩과 나란히 쌓아가던 커리어, 도심의 핫 플레이스들을 즐기던 라이프스타일은 강원도 바닷가 마을, 짠 내에 절고 바닷물을 마셔대는 시골 라이프로 180도 바뀌고 있었다. 주말이면 양양을 찾았고, 서울의 새로운 식당이나 여러 이벤트에 참석하는 것보다 바다에서 파도에 구르거나 멍하니 떠 있는 게 훨씬 재밌는 일이 되어갔다. 몸은 도시의 한 가운데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바다 위 일렁이고 있었다.
한곳에 정착하는 것보다는 기꺼이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자 하는 방랑벽은 나의 오래된 성향이다. 20대가 되고부터 미국, 유럽의 도시들에서 낯선 곳도 내 동네다, 생각하며 한 달 이상을 지내는 게 너무 좋았다. 운 좋게 퇴사나 가능한 근무 환경을 만나며 최소 보름, 한 달을 지내는 여행 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었고, 여행지에서도 '여기서 사는 건 어떨까?' 상상해봤다. 노마딕 라이프를 거치며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오래 지내는 곳에는 무조건 바다가 있을 것. 치앙마이에서 한 달을 지내며 그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푹 빠지긴 했지만, 왠지 모를 권태가 불쑥 찾아왔을 때 깨달았다. "아, 여기는 바다가 없구나" 언제든 첨벙 빠질 수 있는 해변, 맥주를 기울이며 맞는 바닷바람이 없으니 여행도 때론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해졌다.
회사에 다닐 때도 바다로 달려갈 구실을 언제든 만들어 두었다. 제주와 양양에 한달살기 집을 구해두고, 틈나는 대로 바다를 찾았다. 차들로 꽉 막힌 도심보다 바다, 나무가 있는 자연의 풍경이 좋아졌다. 마음이 향하자 일상, 라이프스타일, 삶이 순서대로 슬그머니 따라왔다.
당시 나의 상황도 한몫을 했다.
나는 한 방송 커머스 기업 내 기업문화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 창업 회사를 운영하며 주 4회, 오후 출근이라는 꽤 파격적인 조건으로 전문 계약을 해 일 하고 있었다. 2천 명에 달하는 본사 내부에 문화예술로 창의적인 영감을 소개하고, 새로운 혁신을 도입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게 내 업무의 요지였기에 책상에 묶인 사무 업무보다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병행했던 내 회사를 접고, 그만큼 생겨난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목요일 저녁이면 바다로 달려가 월요일 오후에 출근하는 일정이 가능했다. 회사에서 잘 배려해준 덕분에 재계약 시 한 달씩 텀을 둘 수 있었다. 겨울엔 여름의 나라로 날아갔다. 발리, 하와이에서 한 달을 지내다 새까만 피부로 돌아오길 반복하며 점점 바닷가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반 정도는 파트타임 서퍼로 살며, 또 하나 벌린 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자개장이며 고가구들을 보관할 겸, 여행를 하며 좋은 인상을 받았던 에어비앤비 호스트에 도전하기로 했다. 홍대앞 투룸을 렌트해 한국의 고풍스런 가구들과 홍대앞 로컬 문화를 채운 에어비앤비로 수퍼 호스트가 되어 수많은 외국 친구들을 만났다. 주중의 반은 직장인이자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나머지 반은 바다에서 서퍼로 살며 이중, 삼중 생활을 이어나갔다.
일반 회사원과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랬을까? 큰 조직 내 비슷한 이야기만을 하는 집단 안에선 모두의 등 뒤에서 혼자 소리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아졌다. "그거 다 해봤는데, 안돼" "좋은 게 좋은 거지, 일 만들지 맙시다"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마음도 쉽게 지쳤다. 높은 연봉에 자유롭게 일하는 포지션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불편한 마음이 커지기도 했다. 그 무엇보다도, 바다 옆에서 원할 때면 언제든 그 물결을 눈으로, 손으로 어루만지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목까지 차올랐다.
회사를 그만뒀다.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강원도에 이렇게 자주 오는데... 바다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그리고 연달아, 이 질문이 떠올랐다.
"다른 지역에 가면 뭘 하며 살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막막했다. 연고가 있는 곳도 더더욱 아니었다.
은퇴 후 노인이 되어 간다면 지금 내가 사랑하는 바다와는 전혀 다른 풍경, 다른 삶이 될 것이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바다 옆에서 내가 꿈꾸는 방식으로 살고 싶었다.
일단 먼저 마음을 먹었다.
은퇴 후 말고 지금, 바닷가에서 살아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