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Feb 04. 2018

일곱 밤이 지나고 오늘

백 번째 지난주




일곱 밤이 지나고 오늘


 일곱 번의 밤이 지나면 한 편의 글을 쓰기로 하였다. 그렇게 아흔아홉 번이 지났고, 백 번째가 되었다. 온갖 사소함에도 의미를 두는 성미가 ‘100’이라는 특별한 숫자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였다. 옳다구나 한다. 제 손으로 지은 글 감옥을 잠시나마 출소할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세상에는 이미 좋은 글들이 많았다. 괜찮은 의견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보태었다. 가장 큰 사유는 단연 개인적 욕망으로 국한된다. 나의 목소리, 나의 의견, 나의 글을 지니고 싶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어도 스쳐 갈 온갖 사태에 참견하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많은 독자분을 만나는가 하면,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잠시 긴 휴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아흔아홉 번의 ‘일곱 밤이 지나고 찾아온 오늘’을 돌아보고자 한다. 그 오늘들을 다 이어서 붙일 수는 없기에, 그저 쓰는 자의 태도를 풀어헤쳐 두고자 한다. 일곱 밤이 지나고 오늘이 밝아오면, 이런 글을 쓰고자 하였다.









조금씩 이상한 일들에 묻다.


 조금씩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질문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어째서 특정 지역의 출생 성비는 저렇게까지 차이가 납니까? 어째서 성비에 따른 임금 격차가 저리도 심합니까? 어째서 남성 화자가 가사 노동을 말할 때면, 서술어는 ‘돕겠다’가 됩니까? <지난주>의 방식을 이어나가는 의미에서, 지난주의 어떤 인터뷰를 빌려 질문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째서 저 검사는 8년이나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까? 정말 당신 주변에 말 못 하는 ‘서 검사들’이 없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같이 하겠다는 것입니까? 침묵하지 않겠다는 근엄은 어째서 일제히 침묵하고 있습니까? 


▷ 열한 번째 지난주 「무거운 숙제 _ 강남역 10번 출구에 서서」  

▷ 여든여덟 번째 지난주 「상한 영혼을 위한 시」    

▷ 아흔한 번째 지난주 「그러나 뒤웅박이 _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리뷰」   




비난하기 쉬운 자들에 대한 비난은 대체로 자제하고자 애썼다. 쉬운 비난은 쉬운 판단으로 비롯하는 터라, 깊은 고민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쉬운 비난을 양산하는 자들이 파생하는 부가적인 해악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의 허물을 비출 적에는 그만치의 내 부끄러움도 전시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 서른아홉 번째 지난주 「탄핵은 대박이다.」     

▷ 마흔다섯 번째 지난주 「기표도 없이 기의도 없이」   

▷ 여든한 번째 지난주 「안철수라는 교훈」   




 이런 질문도 했었다. 이를테면 새 정부를 응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감시자의 본분은 다했으면 하는 차원이었다. 마침 크고 이상한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시선은 좀 더 섬세해야 할 필요는 없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너무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든 탓도 있었다.


▷ 예순두 번째 지난주 「복수는 나의 힘」   

▷ 예순일곱 번째 지난주 「섬세에의 강요」   






당신의 안부를 묻다.


 세월호와 촛불에 기대어 쓴 글이 많았다. 조심스러웠다. 응당 비극을 빌리는 행위는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추락하는 사태를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며 떨어지는 모양을 묘사하고 낙하지점을 예측하는 태도로, 글감을 얻어가거나 심지어는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는 구도에 나와 나의 글이 놓이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히도 세월호는 올라왔고, 촛불은 새봄을 열었다. 이 과정을 나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


▷ 스물아홉 번째 지난주 「준비된 기적 _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 리뷰」  

▷ 쉰여섯 번째 지난주 「이것이 세월호의 시작이다.」   

▷ 여든여섯 번째 지난주 「벌써 일 년 _ 촛불, 그 한해의 문장들」   

 



 이웃의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닿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는 랜선의 한쪽 편은 따뜻하고 평안하였다. 툭 하고 던져놓은 글들을 내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다는 죄목이 있다.


▷ 세 번째 지난주 「타인의 절벽」   

▷ 서른한 번째 지난주 「늙어서 미안해 _ 영화 <죽여주는 여자> 리뷰」     

▷ 아흔일곱 번째 지난주 「이웃을 위한 시」   

 



 나는 아직 자신을 청춘이라 믿는 탓으로, 또래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였다. 무덥고 기이한 여름이었다.


▷ 스물네 번째 지난주 「이 여름을 기억해」    






이 땅의 '개인'들에게 묻다.


 쉬운 관계를 경계해왔다. 그러니까 주어지는 이름들, 딸, 아들, 형제, 선후배, 고향, 성별 같은 것들 말이다. 위 관계의 이름들은 이를 얻기 위해 그 어떤 선택적 판단을 요구하지는 않으면서, 우리의 삶을 온통 속박해온다. 이 관계들은 개인을 무력화한다는 결정적 과실을 범한다. 개인이 아닌, 종속적 관계가 출발점이 되어 형성된 사회에서 ‘창의’를 운운하기에 실소한 바가 있다.   


▷ 열여덟 번째 지난주 「창조 없는 창조」   




 아직 혼자가 되지 못한 이 땅의 아들들과 의존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떤 일들에 관하여도 써보았다.


▷ 여덟 번째 지난주 「엄마의 실패」   

▷ 열일곱 번째 지난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혼자는 외롭고 쓸쓸한 이름이 아니다. 그 어렵다는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세상과 마주할 자신을 가다듬는 이름이다. 그리고 고유하고도 살아있는 오롯한 자신의 이름이다. 그리하여 예정된 관계의 이름들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홀로 당당히 서는 존재를 존경하고 갈망해왔다. 홀로 당당히 선 개인이 나름의 우주를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 아흔여덟 번째 지난주 「스크린 밖의 미겔들을 위하여 _ 영화 <코코> 리뷰」   










그리고 아름답기를 아름답기를 아름답기를.


 의아하실 거다. 이 고백에 분명 당황스러우실 거다. 그러나 애초에 그러고자 하였으므로 말씀드린다. 『김태은의 지난주』가 가장 깊게 염두에 둔 바는 단연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었다. 아름다운 문장이기를 바랐다. 한 편의 시처럼 쓰고 싶었다. 한 문장들은 하나의 행이었으면 했고, 한 단락은 하나의 연으로 읽혔으면 했다. 문장의 배열이 호흡을 거스르지 않아, 궁극에는 읽는 일이 아닌 보는 일이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원대한 소망이었던가 보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바로 진실하게 쓰는 것이었다. 진실한 글은 작가의 진심 어린 마음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곧바로 전달되도록 쓰면 된다. 반성하며 짚어본다. 정확한 문장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였던가? 이런저런 반론이 걱정되어 피해간 문장이나 어휘는 없는가? 평탄한 속도로 눈을 보고 말을 하듯 전하였던가? 진심은 전해졌는가?


 진심을 들먹이니, 나를 돌아보게 된다. 가장 큰 실책 하나가 눈에 밟힌다. '나는 올바른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 지면을 소비한 혐의가 있음이다. 세상에 내어놓는 어투를 빙자하여, 잘 포장된 올바름을 전시한 사실이 있다. 반성하지만, 나아질 것인가…. 명확한 이 불찰에 더해 더 많은 오류가 있겠으나, 애써 더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백 편의 지난주’는 곧 ‘나’이다. 내가 여지없이 폭로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이 글들이 부끄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 변화를 성장으로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필부의 성장 여부와는 무관하게, 아름답고자 쓴 글이 미적 성취를 이룩하지 못하였음을 겸허히 인정한다. 본 글들이 기여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신은, 당신의 삶은, 그리하여 우리의 세상 모두는 아름답기를 아름답기를 아름답기를.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김태은의 지난주』 CI, 자체 제작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지난주’를 썼던 카페에 와 있습니다. 다시 읽으니, 비문(非文)이 눈에 밟히네요. 수정하려다가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지난 백 편의 글은 미숙하나마 저의 성장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미숙한 성장기를 읽어주신 구독자분들 생각이 났습니다. 죄송함과 감사함이 교차합니다. 감사함을 떠올리자니 독자 여러분께만 인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로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과 글을 담을 멋진 공간을 제공해준 브런치에도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이번 주는 뭘 쓸까?’라는 고민으로 채웠던 ‘100번의 지난주’를 기억하겠습니다. 그 ‘100번의 지난주’에 여러분이 함께 해주셨음도, 역시 기억하겠습니다.


 당분간 쉴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구상 이후에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새하얀 여백이 그리울 때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안녕히, 부디 안녕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