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사주나 대표에게 노골적으로 아첨하고 최선을 다해 비위를 맞추는 임원들을 보면서 진짜 웃음을 파는 사람들은 술집 여자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라고 느낀 적이 여러 번 있다. 똑같이 웃음을 팔면서 왜 어떤 사람들은 잘살고 어떤 사람들은 경멸받을까?
회사를 그만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입사를 하며 태도가 돌변했던 사람이 기억난다. 소심해 보이고 존재감이 별로 없었는데, 재입사 후에는 적극적이고 당당해 보였고 회사의 실세 중 한 명이 된 것 같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당시의 정황과 소문,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밝혀진 사실들에 따르면, 재무 담당자였던 그는 재입사 후 대표의 횡령과 돈세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 같다.
그는 왜 그렇게 변한 것일까? 막연히 추측하기로는 부정이 만연한 우리나라 기업 환경에서 순탄하게 직장생활을 하려면 아예 적극적으로 부정에 가담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다른 괜찮은 일자리를 잡았다면 좋았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웃음을 팔면서, 양심을 팔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나를 비롯해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재주도 없다. 그런 처세법을 멀리한다고 해서 고상하고 품위 있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게 참 더럽고 치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수많은 직장인들의 보편적인 경험일 것이다.
한때 ‘먹고사니즘’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모든 가치와 권위가 무너지고 나면 남는 것은 이해관계뿐이다. 요즘은 이 말이 쓰이지 않는데 이런 현상이 없어져서라기보다는 너무나 당연해져서 굳이 따로 용어를 쓸 필요가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유명인에게 의혹이 제기되면 여론에 묻어가며 증거도 없이 함부로 비난하고 매도하면서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재벌의 구조적 비리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일에서는 부당함을 호소하며 정의의 문제로 둔갑시키면서, 자신과 상관없는 진짜 부당하고 불의한 일에는 눈 감는 현상도 팽배하다. 그들의 정의감은 자신의 이해관계라는 테두리 안에서, 만만한 대상에게만 선택적으로 발동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근본 원인을 따지기보다 만만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며 자신만 부당한 희생자로 여기는 왜곡된 피해의식은 여러 사람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회사 조직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360도 인사평가란 게 있다. 상급자만 하급자를 평가하는 게 아니라 상사, 동료, 부하직원이 360도로 특정인을 평가하는 인사평가 제도다. 좋아 보이지만 단점도 많다. 어떤 제도든 섬세하게 조율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큰 법이다.
한 편집팀장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360도 인사평가를 받았다. 그 회사에는 그것을 ‘리더십 평가’라고 불렀는데, 그 팀장은 본부에서 꼴찌였다. 그 팀장은 20여 년 동안 원만하게 회사생활을 해왔는데 그런 평가를 받으니 큰 충격을 받았다고 내게 털어놓았다. 그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었다. 그런데, 그 팀의 팀원들은 왜 팀장에게 그토록 낮은 점수를 준 것일까?
오래 전부터 회사에서 그 팀을 심하게 압박했다. 팀장이 교체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팀원들은 회사에 대한 불만을, 아무 상관이 없는 새로 입사한 팀장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경영자나 회사를 비난하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거취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 있으므로 사내 입지가 취약한 만만한 관리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일은 회사에서 흔하게 발생한다.
예전에 어떤 편집자에게 임원의 지시로 계약한 도서를 담당하라고 하자 크게 반발한 일이 있었다. 이미 다른 직원들은 회사 차원에서, 혹은 임원의 명으로 계약한 원치 않는 도서들을 여러 종씩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직원의 성향을 알면서도 형평성을 위해 아무도 원치 않는 그 도서를 그 직원에게 맡긴 것이다. 고분고분한 직원에게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몰아주는 부서장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힘든 일이든 빛나는 일이든 최대한 골고루 분배하려고 늘 애썼다.
그 직원은 그 일에 대해 계속 불만스러워하다 한참 후에 브랜드 컨설팅을 위해 방문한 외부 컨설턴트에게 자신이 원치 않는 책을 억지로 맡겼다며 나를 비난했던 것 같다. 그 컨설턴트는 브랜드 컨설팅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다른 분야의 책을 잘 만드는 직원에게 왜 잘 안 맞는 책을 억지로 맡겼냐며 내 잘못을 지적했다. 공개석상에서, 그것도 외부인에게 그런 지적을 받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 직원은 의도적으로 나만 험담한 것이었다. 그 책이 계약될 당시 내가 반대했으나 임원의 명으로 계약된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외부 컨설턴트에게 그 얘기를 쏙 빼놓고 나만 비난한 것이다. 외부인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회사원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일이기도 하다.
그 브랜드 컨설팅은 해당 임원이 주도한 일이었고, 그 컨설턴트도 임원이 섭외했다. 그걸 아는 직원이 임원의 험담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인사권이 있는 임원의 귀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불리할 테니까. 그런 경우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 직원은 그 임원 때문에 원치 않는 책을 만들게 되었음을 잘 알면서도 만만한 나만 비난했다.
다른 동료들이 원치 않는 책들을 연속으로 만드느라 기획할 시간도 없을 지경인데, 자신은 무조건 스스로 기획하거나 원하는 책들만 만들어야 한다고 여긴 건 무슨 기준에서였을까? 그 직원은 평소에 늘 정의롭고 동료들을 아끼는 사람으로 자처했다. 늘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정의를 내세웠다. 조금이라도 불의라고 여기는 것을 보면 심하게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왜 동료들은 하기 싫은 책들을 여럿 담당했는데 자신은 원치 않는 책을 단 하나도 맡지 않으려고 했을까? 동료들을 아끼는 마음과, 힘든 일들을 동료와 나누는 것은 그 직원에게는 별개의 문제였을까?
브랜드 컨설팅 개별 면담에서 그 직원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과 임원이 내가 독단적인 게 팀의 문제라고 지적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컨설팅을 한 시점은 내가 허수아비 팀장을 스스로 그만둔 지 반 년이 넘었을 때였다. 내가 맡은 일에만 집중하고 다른 팀원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독단적일 수가 있을까?
출판계에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수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컨설팅을 한 이유가 모든 잘못을 내게 뒤집어씌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수천만 원은 원래 다른 중요한 사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내 여러 인사들이, 그 임원이 무리하게 자금을 전용하는 바람에 연초 사업계획에서 확정되었던 진짜 중요한 사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당시 내가 속한 팀은 물론이고 본부 전체에서 그 임원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팀원들은 평소에는 일상적으로 그 임원을 험담했으나 컨설팅 면담에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당연하다. 그런데 왜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 나에 대해 비난했을까? 그것도 생판 처음 본 외부 인사에게.
어쩌면 내가 맘대로 팀장을 그만두고 더 이상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않은 데 대한 배신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처럼 팀장을 4년 역임했다는 것 자체가 나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불가능했다기보다는 아마도 4년이 되기 훨씬 전에 다들 그만두었을 것이다. 리더십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은 편집팀장은 1년여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김수영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독재 정권의 거대한 불의에는 침묵하면서 설렁탕집 주인에게, 이발쟁이에게, 야경꾼에게 반항하고 불평하는 소시민의 비겁함을 자조적으로 읊었다.
독재가 무너진 지금은 사람들이 경제 권력과 이권 앞에서 침묵하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불만을 쏟아낸다. 권력과 이해관계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루하다. 적어도 자신이 비루하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을 때만 비루해진다면 이 세상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최소한 만만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