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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Nov 02. 2020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사람들

2000년대 초반 미국 대선을 취재했던 방송 기자가 당시 워싱턴을 장악했던 네오콘의 사상적 기반인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에 관해 쓴 책이다. 나는 원고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많이 팔릴 줄 알았다. 그때는 출판 경험이 많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국제정치에 관심이 적은지 몰랐다.

      

그러나 로쟈나 장정일 등의 지식인들이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보고 쓴 서평을 인터넷에서 읽고 그래도 좋은 책을 출간했다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추천사를 의뢰하러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님을 연구실로 찾아뵈었는데, 연구실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정말 기뻤다. 소수의 독자라도 책의 가치를 알아준다면, 특히 그 소수의 독자가 학계와 문화계의 주요 인사라면 판매 부수와 상관없이 책의 영향력은 클 수 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소수의 엘리트가 다스리는 사회

     

시민들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무지한 개, 돼지로 생각하는 위선적인 정치인들은 정치 풍자의 단골 소재다. 선거 캠페인, TV 토론 등 민주주의의 절차는 대중을 현혹하기 위한 화려한 쇼일 뿐, 진짜 정치는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러한 엘리트 중심주의가 무려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독특한 주장이 아니다. 이 책은 이미 잘 알려지고 공개된 자료들을 잘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 네오콘의 사상적 뿌리가 레오 스트라우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의 저작과 관련 자료들을 탐독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 정치철학자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온 후 시카고 대학교에 교편을 잡았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 유대교 신비주의, 니체, 하이데거 등의 영향을 받아 정치 철학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공화당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그의 사상을 기반으로 미국 중심적 극우 정치를 실천했다고 한다. 그 결과 현실 정치와는 안 어울리는 ‘악의 축(Axis of Evil)’ 같은 수사적인 표현들을 내세우며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테러는 개인이 저지르는 것인데, 국가와 대립할 때처럼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더니 실제 국가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쳐들어갔다. 아프가니스탄의 지배 세력 탈레반과 9.11 테러와의 연관성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라크 전쟁은 명분과 근거가 미약했다. 당시의 실세 부통령 딕 체니를 다룬 영화 <바이스>에 따르면 네오콘 세력은 처음부터 이라크를 쳐들어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미리 이권을 분배하기까지 했다. 이라크 전쟁이 미국을 수렁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또다른 악의 축, 북한도 공격했을지 모른다. 

     


그들만의 리그이너서클에서 벌어지는 일들    

 

<바이스>는 겉으로만 민주주의의 탈을 쓴 채 밀실에서 짬짜미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을 내리는 소수 권력자들의 세계를 블랙 코미디로 그려낸다. 딕 체니로 분한 모습만 보면 우리의 영원한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영화에 따라 자유자재로 몸무게를 줄였다 늘리는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뚱뚱하고 노회한 딕 체니를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중동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심지어 딕 체니 팀의 멍청하고 근시안적인 정책이 ISIS(Islamic State in Iraq and Syria)를 키웠다) 딕 체니는 놀랍게도 아내의 인정을 갈망하는 로맨티스트였고, 레즈비언 딸의 사생활이 공격당할까 봐 선거를 포기한 딸바보였다. 능력이 출중한 야심가 아내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보다 모자란 남편을 다그쳐서 대학을 졸업시키고 정계에 입문시켰는데, 딕 체니가 정치적 술수에 천부적 재능을 보이면서 출세길이 열린다. 
 

이처럼 대외적으로 커다란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사실은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더 관객을 경악하게 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운이 좋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고 자기 편의대로 정치를 하면 재앙이 발생한다. 영화에 따르면 딕 체니는 이론에 빠삭하지는 않았고, 행정부가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르도록 법을 해석하고 이론을 제공한 그의 수족들이 네오콘의 브레인이었던 것 같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중우정치에 희생되었다고 보아 민주정치에 회의를 느꼈고 검증된 철인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는 성리학이라는 특정 학파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을 자동으로 연상하게 한다. 신분이 세습되는 왕이 아니라 능력이 검증된 사대부 집단이 국가를 통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믿었던 정도전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 꿈이었을까? 신하들이 왕과 세자에게 자나 깨나 성리학 공부를 강요하고 성리학적 도덕관에 입각해 정치를 하라고 압박했던 조선 시대는 왕권과 신권이 늘 대립하며 주도권 다툼을 했는데 그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철학을 많이 공부해도 사리사욕과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공부를 많이 한 철학자가 사욕을 버리고 무지몽매한 대중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채택했다는 나라들의 현실을 보면 중국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보다 더 나은 게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러시아는 체제 개방 후 알코올 중독자가 대통령이 되고 마피아가 실권을 잡더니, 이제는 국민이 지지하는 독재자가 장기 집권 중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스스로도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것 같은 사람들이 정치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시민들의 직접 투표로 자질과 능력이 몹시 부족한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뽑혔었다. 그에 비해 중국에서는 최소한 능력은 검증된 사람들이 지도자로 올라오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부분 때문에 검증된 엘리트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역사상 끊이지 않는가 보다.

      

내가 중국인이라면 머릿속이 복잡할 것 같다. 공산당 독재가 끝난다고 더 좋은 세상이 열릴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분열하고 곳곳에서 국지전이 벌어지고 금권정치가 판을 칠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의 난장판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최소한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공통의 목표로 국가를 통합하고 있다. 푸틴의 독재를 받아들이는 러시아인들도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나라도 마피아의 지배보다는 차라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독재자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 같다. 그러나 한때 효율적이었던 독재 체제가 한계를 드러내고 걷잡을 수 없는 부패로 빠져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안 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하면, 그들도 근본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이스>를 만든 애덤 맥케이 감독은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빅쇼트>도 만들었다. <빅쇼트>에서 크리스찬 베일은 금융 파생상품의 허점을 간파하고 반대로 투자하여 대박을 터뜨린 괴짜 천재로 나온다. 호평 일색이었던 <빅쇼트>에 비해 냉소주의와 빈정거림이 한층 심화된 <바이스>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감독의 관심사에 비추어 볼 때, 트럼프 시대에 대한 블랙 코미디도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이기든 지든, 공화당이 망했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네오콘이 가뜩이나 위태위태했던 중동을 전쟁의 악순환에 빠뜨려 세계의 큰형님을 자처하던 미국의 위상이 땅으로 추락한 후 공화당 주류가 아닌 엉뚱한 인물이 밖에서 들어와 민심을 장악했다. 트럼프가 이기더라도 공화당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공화당만 망하는 게 아니라 미국 전체의 발목을 잡고 함께 진창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형은 미국과 상당히 달랐지만 갈수록 비슷해지고 있다. 기독교 극우 세력이 보수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고, 온갖 가짜뉴스가 정치적 어젠다를 대신하고 있다. 약자들은 다른 약자 집단을 혐오하는 정치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한국의 보수 역시 인물이 없어 외부에서 엉뚱한 인물을 꿔 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경제성장, 유례없는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다. 지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진짜 선진국은 우리나라인 것 같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오래 전 실험했던(?) 나라이기도 하다. 그동안 스스로를 후진국이라 여겨 국제정치에 눈 감고 살았지만 이제는 세계 각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미국을 반면교사 삼아 한층 성숙한 민주주의를 꽃피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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