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DA
린다.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탄탄한 거미줄처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굉장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직원 입장에서 워라밸이 합당하게 이뤄지고 존중받는 것 같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피도 눈물도 없이 냉철하기도 한 것이 미국 회사랄까. 그날 출근한 직원을 그날 바로 해고할 수 있고, 직원이 해고통보를 받고 자리에 오자마자 어제까지 쓰던 본인 컴퓨터에 접속조차 안 되게 하면서도 일한 만큼의 보수는 정확하게 챙겨주니, 돈으로 치사하게 굴진 않지만 인정머리는 더럽게 없는 그런 느낌. 아무튼, 그것이 내가 이후에도 미국에서 일을 하며 느꼈던 것들이고 이런 부분을 일단 옆으로 밀어두고서,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상사로서 맞이했던 린다는 이러한 자본주의와 합리주의 중에서도 매우 구겨진 점들로만 꽁꽁 뭉쳐진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풀어내고 싶어졌다. 세상에 이런 사람, 아니 아니, 미국에도 이런 상사가 존재한다니까요. 들어보세요. 라면서.
린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한국에서부터 짝꿍에게 여러 번 들어왔다. 본인이 예전에 캘리포니아에서 일을 할 때 상사로 '린다'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정말 못 됐다고. 하루에 열두 시간이 넘게 일을 시키고, 굉장히 예민하며 말도 안 되는 것들-이를테면, 엑셀로 뽑은 리포트의 하이라이트 노란색이 너무 진해서 싫다고 좀 더 옅은 채도의 색으로 바꿔서 다시 프린트해 오라거나, 글씨체와 크기가 마음에 안 드니 바꿔 오라는 등의-로 중요한 회의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진행하지 못하고 끝맺는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었다. 물론 그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던 것은 아녔지만, 데이트를 하면서 아무래도 서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들 중 하나였다. 어찌 보면 그가 한국에 올 결심을 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녀 밑에서 일한 후로 번아웃이 세게 왔고, 그 이후에 선택했던 것이 한국행이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를, 우리를 미국으로 다시 불러들인 결정적 계기가 된 것 역시 그녀였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나는 그녀를 원망해야 하는 걸까 감사해야 하는 걸까. 나를 이방인의 삶으로 본격적으로 끌어당긴 그녀에 대해서.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조금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영어를 가르치는 일밖에는 없었고, 궁극적으로 그가 원하는 길이 아녔기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한국 내에 있는 그의 전공을 살릴 수 있을만한 다른 글로벌 기업을 찾아보고 있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파견되어 온 것이 아닌 이상 한국어를 어느 정도는 해야지 유리했는데, 그의 한국어로는 역부족이었다. 한국어를 아예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기업에서 업무를 수행할 만큼의 레벨이 아녔을 뿐.
그러던 중에 린다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는 이 기회를 잡고 싶어 했다. 비록 썩은 동아줄이라도 다시 원래의 커리어로 돌아갈 수 있게 끌어줄 테니 일단 잡고 보고 싶은 그런 느낌였을까. 어쩌면 그가 그녀를 떠나온 시간 동안 그녀가 조금은 변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린다가 그에게 제안했던 것은 그녀 회사의 CFO(재무이사) 자리였고 비록 큰 몸집의 회사는 아녔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연봉 또한 나로서는 그동안 소위 말로만 들어본 연봉이었다. 한국에서의 당시 우리 둘 연봉을 합치더라도 그녀가 제시한 연봉의 반 정도에도 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이 다시 초롱초롱 빛이 났다. 앞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미국에 간다고 해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식을 두 달 앞둔 시점에서 우리가 앞으로 미국으로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고, 그때부터 이민과 결혼을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이후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일을 먼저 시작해야 했던 그가 나보다 한 달 정도 일찍 미국으로 들어왔고, 그게 우리 결혼생활이자 나에게는 이민생활의 시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첫인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작고 왜소한 체격에 상냥하고 여리여리한 말투.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는 조금 더 목소리가 크고 힘도 있고, 몸집도 있고 키가 큰 그런 백인 여성이었는데, 실제로 만난 린다는 전혀 못돼 보이지가 않았다. 나에게도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스몰 토크도 이따금씩 해오면서 다정한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어쩌면 그의 기억이 살짝 뒤틀려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나는 처참하게 틀렸다. 그녀의 첫인상을 믿고 온 다른 모든 직원들도 나처럼 처참하게 틀렸다. 우리 모두는 린다를 여러모로 과소평가했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간단히.
- 그녀는 저녁 6시에 회사에 나온다.
그가 출근하는 8시쯤에는 이미 스무 건 정도의 보이스메일이 그녀로부터 남겨져 있다. 그 보이스메일들을 확인하다 보면 그녀가 전화를 한다. 대궐 같은 집에 사는 린다는 그녀 집 안에도 사무실 같은 공간이 있고 거기서 일처리를 하면서 회사로 전화를 하는 것인데 이렇게 점심시간 직전까지 거의 틈 없이 전화가 이어지다가, 오후에 살짝 잠잠하다가 그가 퇴근을 하려고 할 즈음에는 그녀가 출근한다, 보통 저녁 6시에. 그리곤 그를 데리고 회의를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집에 오는 시간은 8시를 넘어가게 된다. 때로는 저녁을 시켜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저녁이 소화가 잘 될 리도 없고, 맛이 있지도 않아 그저 허기진 배를 달리는 역할만 해줄 뿐이다.
-그녀의 오피스는 화장실과 연결되어 있다.
보통 저녁 6시에 시작하는 회의는 그녀의 오피스에서 이뤄지는데, 구조가 독특해서 오피스에 회사 건물 여자화장실과 연결되는 문이 있다. 그래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화장실에 가게 되면 회의하는 내용이 화장실에서 다 들릴 정도라 나는 혹시 회의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아래층으로 일부러 내려가서 화장실을 이용하곤 했는데, 그녀는 누구 와든 회의를 하다가도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자유롭게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곤 했다. 그러면 회의 중이던 다른 직원들은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려야 했고, 나는 그것이 상당히 무례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보다 더 무례하게 느껴진 것이 있었는데,
-그녀는 방귀대장 뿡뿡이.
처음 그녀의 방귀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이게 맞나 싶었던.
또각또각 소리가 청명하게 나는 킬힐을 신고 짝꿍의 오피스로 온 그녀는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방귀를 뿡뿡 댔다. 더욱 놀라웠던 건, 그가 이런 것들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던 것.
그녀가 오피스를 떠나고 나서 놀란 내가 방귀 소리 못 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내게 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다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했다. 아니 이건 뭐랄까, 너무 상식 밖의 행동이라서 당황스럽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었다. 그리고 그 방귀 소리가 우연한 실수가 아녔음을, 그 이후로 여러 번 뿡뿡 대던 그녀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 글로 쓰는 지금도 믿기지가 않지만 사실이다. 아무 데서나 방귀를 뿡뿡 뀌고, 아무 데서나 트림을 거억거억 하는 그 매너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진절머리 나는 오만함.
-그녀는 일부러 외국인을 고용한다.
내가 일하던 당시, 그곳에는 유학생 출신들이 많았다. 대만에서 왔던 친구, 중국에서 왔던 친구, 알마니아에서 왔던 친구 등등 외국인으로서 취업비자를 받고 일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는데, 다들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한 후 이 회사로 취업을 하게 된 케이스였다. 물론, 비율로 따지고 보자면 미국인들이 대다수인 회사이긴 했지만 이렇게 외국인으로서 고용된 친구들이 꽤 있었고, 보통 그 친구들이 일하는 시간은 내 짝꿍처럼 매우 긴 편이었다. 그래도, 크게 불만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비자가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장 회사에서 해고되면 비자와 신분 문제가 불안해지는 친구들이었다. 신분이 불안해진다는 것은 곧 미국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곳에서 유학을 한 그들 대다수가 미국에 더 머물고 싶어 하고 있었다. 이렇게 불만이 있어도 불만을 말하기가 힘든 구조였음을, 린다가 그들이 그런 입장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짝꿍을 통해서 들었다. 나를 포함한 동양인들의 문화적인 특성상 일을 묵묵히 열심히 하고 상사에게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건 너무나 야속하고 치사한 경우이지 않나. 이런 걸로 사람을 이용하다니.
짝꿍은 아마도 그 회사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주장을 굽히지 않고 들이대는 직원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러 번 그는 이런 부분에 대해 그녀에게 언성을 높이며 비판했고, 여러 번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직원들의 일하는 시간을 줄여주거나 연봉을 높여주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진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린다의 성향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양심이 빠진 그녀에게 합리적인 비판은 귓등에 스치는 바람처럼만 들렸을 뿐이리라.
이 외에도 여럿 들으면 충격적인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그녀의 회사는 그녀보다 스무 살 정도 많은 남편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토지개발 회사였고,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큰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어 땅을 소유하고 개발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호텔이나 리조트를 짓기도 하고 환경단체들과 협업을 하기도 하는, 린다가 추진력이 조금 더 있었다면 아마도 더 많은 프로젝트들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여러 좋고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오가는 가운데 실제로 진행된 프로젝트는 몇 되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 써야 할 디테일은 리포트의 글씨체나 글씨 크기, 색깔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후에 그녀의 개인사는 들으면서 인간적으로 안타까운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진짜 '사랑'을 받아보기 힘들었던 삶이었으리라라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가 있었다. 대부분 그녀를 오랫동안 알아온 이들로부터 흘러오는 꽤 근거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내게는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매정하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그 자신 말고는 모두를 그녀 아래로 두는 듯한 행동과 진심이 없는 말투가 너무나 선명했다. 그곳을 떠나온 후인 지금도 가끔 궁금하긴 하다. 과연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누군가가 있기는 할까.
그녀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사랑'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랑을 주고받은 자잘한 기억들이 한 사람의 영혼을 충만하게도 빈곤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
나의 영혼은 충만한가, 구멍이 있는가.
나의 영혼에 사랑만은 충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랑이 늘 내게 기쁨만 준 것은 아녔지만.
외국에 와 있어서 그런가, 그 사랑이 찢어놓은 구멍으로부터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들이 더 잦아졌다.
나에게 언제 이런 구멍이 생긴 건지, 왜 이런 바람이 부는 건지.
나는 나의 구멍을 채워가야 했다. 더 이상 바람에 찢겨나간 틈으로 구멍이 커져가도록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었다.
나는 나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래도 아직은 미국이 낯설었다. 아주 많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