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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휘재 Oct 26. 2024

균탁 5




오타니가 못 치면 프리먼이 친다. 둘 다 해내지 못하면 양키스가 이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다. 불편不偏은, 섭입이 아닌 껴안음은, 귀속되지 않을 만큼의 거리는 기쁨과 슬픔의 동타가 슬픔과 기쁨으로 뒤집히고 끊임없이 회전하며 뒤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될 즈음 포수 미트에 꽂힌다. 미트에 박힌 볼이 된 처지는 이제 어디로 향하나. 아웃 카운트도 모르고 주자도 보이지 않는다. 포수는 격동 없이 묵직하다.


엄마가 덮었던 이불 빨래들을 옥상에 널고 안방 화장실을 청소했다. 펜션방을 예닐곱 개씩 청소하던 것에 비하면 힘들일은 아닌데 힘이 든다. 힘이 들어서 꾸역꾸역 보름이나 밀쳐냈다. 미루는 동안이 아까워 푹신하고 넓은 안방 침대에서 자보려고도 했다. 십 분도 못 되어 좁고 불편한 제 방으로 돌아가 누웠다. 그러면서 24시간제의 시계가 12시간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른 열 시에 자고 늦은 다섯 시에야 일어났다. 오전과 오후가 사라졌다. 내 속의 무엇도 옅어지고 있었다.


내 거처가 아닌 곳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토바이도, 모기도, 날더러 이제 그만 이 집에서 꺼지라고 소리치는 게 아닐까. 모두가 떠난 집. 떠나며 남긴 부스러기들을 부지런히 닦아내야만 겨우 살 수 있는 집. 내 것이 아닌 것들로 가득한 집. 그러나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집. 나는 아마 죽으면 이 집의 터주신이 될 것이다.




엄마가 요리를 하느라 주방은 난장판이었다. 아빠는 틈만 나면 여기저기에 기침을 해댔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식도와 기도 근육이 약해져서 그렇다지만 일찍이 그런 줄로 알았더라도 나라면 분명 불쾌했을 것이다. 테이블을, 바닥을 지금 당장 닦고 싶은데 그러면 아빠는. 나의 불쾌함을 닦아내면 누군가는 불편해질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꼭꼭 방 안에 걸어 잠갔다. 그냥 유쾌하게 좀 닦아보지.


어떤 생각은 난장판이라면 아주 질색한다. 누군가 나(어떤 생각)의 영역을 흩트리는 것, 또 남에게 손을 맡기길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가 요리하는 틈으로 슥슥 훔치고 닦으며, 버리며―엄마는 외가 쪽이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누가 그렇지 않겠어요. 자신을 없애야만 하는 거지요.

그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그리던 모습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밝았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러려고 하나님을 참 많이도 찾았다. 생각이 괴롭힐 때마다, 두려움이 길을 막아설 때마다 눈을 감고 별을 바라봤다. 명상으로는 끽해야 알아챔이나 무아경 신비체험뿐이니 나는 나아가 별들에게 물을 테고 별들에게 꼰지를 테다. 꼰질러서 하나님이 보게 할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한계가 명확하다.


엄마는 아빠가 일러준 날짜보다 하루 일찍 돌아간다고 했다. 또오 땡이다. 당장 전화를 걸어 아침에 동그랑땡 좀 그만 부쳐 드시라고 농을 치고 싶었다. 검사 절차 같은 것들도 미리 알려서 쓸데없이 고민스럽게 하고 덧없이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했다. 그마저도 엄마의 말과 달라서 혼란이 되었고 실상은 정작 또 달랐다. 빨리 가면 빨리 가는 대로 서운하고, 늦으면 느린 대로 생기는 불만. 예언과 예언으로 인한 기준이 흔들리며 생기는 균열. 우리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예언은 누구라도 함부로 내뱉어선 안 된다. 닥치면 자연히 해결되는데. 하나님이 이끄시는데.


닥치면 잘한다. 빛날 정도로 잘된다. 그러나 닥치게 할 줄은 모른다(그런 건 신의 할 일로 내버려 둔다). 부딪힐 줄 모른다. 부딪치면 받아낼 뿐. 파도가 오면 맞을 뿐. 젊은 날의 파도는 될 수 없겠구나 더는. 갯바위가 메말라 부서져야 바다로 굴러 떨어지겠구나 정녕. 하지만 아쉽지 않다. 무엇에도 속지 않게 된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 할 말이 줄어든다는 것. 인생 자알 돌아가고 있다는 것.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났더니 며칠 동안 고심하다 주문한 옷이 문밖에 와있었다. 색깔만 다른 두 벌이었다. 쌀쌀해지니 두꺼운 옷을 찾는다. 장롱 안에서 찾지 못하고 스마트폰 속에서 찾는다. 한대 패주고 싶지만 참는다. 바보 같지만 괜찮다. 그래봐야 이 년 전에 생산된 옷이라 합쳐도 십만 원도 안 된다. 한 벌은 아빠를 입혀 드릴 수도 있다.


옷은 무척 마음에 드는 한편 역시나 불필요하다는 찝찝한 마음과 동타가 되어 미트에 꽂혔다. 이번에는 홈런처럼 기분 좋게 넘기기로 했다. 새 옷으로 인해 내가 잠시 기분이 좋고 그것이 잠잠하다가 어느 날의 만남 속에서 더 넓은 좋은 기분이 될 것이고 결국 그를 보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것으로 생각키로 했다.


좋은 기분으로 내일 할 궂은일까지 모두 마쳐버렸다. 종일 진땀을 빼고도 감회를 남길 수 있는 기분이 남아 하릴없이 쓴다. 기쁨을 얻었으니 기쁨을 만족시키기 위해 땀을 마저 흘리는 것이다(어느날 나를 얻었던 부모님도 그렇게 살아오셨을 테지). 어차피 나는 당장 12시간제이다. 그것은 6시간 형식으로 바꿀 수도 있고 72시간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그런 정신이 (지금은)내게 있음에 감사한다.


내일을 살았으므로 내일이 텅 비었다. 뭐 할까 내일. 내일은 아웃 카운트도 모르고 주자도 보이지 않는다. 포수는 격동 없이 묵직하다. 무릎이 쇠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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