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느려도 여유롭게
커리어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삶의 잣대를 '성장'에만 두었다. 여기서 성장은 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려는 실행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차가 낮았을 땐 열심히 배우고 배운 것 이상으로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팀의 리더 자리를 맡으면서 단순히 좀 더 잘하는 수준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느껴졌다. 큰 전략을 세우고 상위 리더를 설득하는 일, 팀원과 목표를 얼라인 시키는 일, 성공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채용도 비용 협상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전엔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가면 된 것을 갑자기 서너 계단씩 오르라 한다. 올라가지 못하면..? 그 뒤의 결말이 두려웠다. 나는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할까 봐. 주변도 그렇고 SNS로 연결된 사람들이 IT/스타트업계에 있다 보니 주변이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의기소침해진다. 이들 주위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AI로 앱을 만들고 영상을 만드는 일은 이미 업계 필수 요건이고 나는 한참이나 뒤쳐진 것만 같다.
이 모든 것들에 위기감이나 열정보다 피로감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인데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역설적으로 몸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비명을 지른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속한 세계가 얼마나 빠르고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있는지 깜짝 놀라곤 한다. AI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고 지브리 그림을 그리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너무 스스로를 다그치진 않았는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오를 순 없는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