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10월 회고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지는 상관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궤도> 중
긴 연휴를 보냈다. 무언갈 계획하지 않고 빈 시간을 채우려고 하니 그것도 고역이었다. 더군다나 날씨는 내내 흐리고 비도 내려서 멀리 여행을 가기도 애매했다. 나는 미루고 미뤄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일 중 하나였다. "나중에 소설을 쓰는 게 꿈이에요" 처음 인턴을 했던 회사에서 팀장님과 사수분께 꿈을 말한 적이 있다. 그때의 상황과 맥락은 오래전 기억이라 흐려졌지만 두 분께서는 열렬히 응원하며 나중에 소설에 꼭 본인을 출현해 달라고 했었다. 나는 언젠가 꼭 그들을 소설 속 등장인물로 담아두리라 속으로 결심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소설은 먼 나라 일처럼 되어 버렸다. 요즘엔 개인 글조차 한 달에 한 번 쓸까 말까인데 소설은 오죽하겠는가. 먼 훗날 꿈으로만 둘 줄 알았던 소설 쓰기는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다. SNS 광고에서 발견한 인터뷰 에세이 제작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후속 프로그램인 소설 출판 프로젝트도 연다고 해서 신청했다. 성실히 참여만 한다면 100% 환급 조건이니 해봐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데뷔작은 자전적인 경우가 많다. 소설을 쓰려면 인물과 배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필요한데 자신의 경험이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첫 단편은 자전적이면서도 근미래의 SF적인 배경을 덮어 실제의 내 모습과 거리를 두려 했다. 내 생각을 정리만 하면 되는 에세이와 달리 소설은 인물들 간의 관계, 사건들의 개연성을 계속 신경 써야 했다. 글을 쓰는 내내 인물들이 종이인형처럼 가볍고 밋밋해 사건 속에 겨우 붙들여 전개하는 연속이었다. 나름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소설은 젬병인 걸까 싶었다. 그렇게 연휴 동안 인물들을 양손에 붙잡고 결말까지 끌고 간 덕에 단편을 끝낼 수 있었다. A4용지에 10pt 글자로 딱 10장 분량이다. 출판 조건은 최소 70장이니 이걸론 턱 없이 부족한 양이다. 이렇게 된 이상 출판보다 이야기를 완성한다에 목적을 두고 남은 기간 나머지 글을 쓰기로 했다.
첫 단편이 처참하게 끝났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다음 편도 SF 장르이지만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다. 전부터 소설을 쓴다면 꼭 다루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다. 바로 지난 2년간 고시원에 오가며 마주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삶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했던가. 그 시절의 주변 세상은 지금으로선 결코 경험하지 못할 유형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로 인해 웃기도 화를 내기도 울기도 했으니, 그때는 힘들었을지라도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다. 온전히 내 경험에 기반해 쓰는 것이어서 첫 단편과 달리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즐거웠다. 25살의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내가 소설이 안 맞는 게 아니라 충분한 이야기가 부족했던 것이리라. 최근에 개발자였다 1년 동안 갭이어를 하면서 작가에 도전하는 분을 만났다.
"안되면 다시 개발하면 되니까요." 말하는 그의 눈에는 반짝임이 가득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를 보면 부럽고 대단하다. '어쩌면... 나도?' 출간을 못하더라도 등단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올해의 목표는 출간 대신 공모전 참가를 목적으로 남은 단편들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누군가 올해 중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말해달라고 한다면 바로 10월의 그날을 얘기하고 싶다. 연휴가 끝나가는 시기에 철원으로 당일치기를 떠났다. '철원에 왜 가?' 철원을 다녀왔다고 하면 하나같이 '왜?'라는 물음을 보였다. 철원 하면 휴전선 최전방을 떠올리기 마련이니까. 내가 철원을 가는 목적은 명확했다. '고석정'을 방문하는 것. 고석정은 여러 드라마의 로케이션으로 유명한 장소였다. 사진으로 본 그곳은 꽤나 운치 있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철원으로 오가는 버스는 몇 없었기 때문에 새벽 일찍 일어나 출발했다. 연휴 내내 흐린 날씨여서 날이 좋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과 무색하게 맑아진 하늘이 철원으로 향하는 이들을 반겼다. 산뜻한 출발이었다.
철원고속터미널에서 고석정까지는 거리가 있어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택시 기사님은 유쾌하신 분이셨다. 평소라면 적당히 말을 맞추고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갔을 나였지만, 그날은 왠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요즘에 철원에 방문하는 사람이 많냐', '고석정 근처에서 혼밥 할 만한 데가 있냐', '꼭 가볼 만한 장소는 뭐냐' 등등 손님이 이것저것 묻자 신이 난 듯 기사님은 묻지 않았던 정보까지 알려줄 정도로 신경 써서 얘기했다.
"나중에 내려갈 때 연락 줘어~"
그는 명함을 건네주며 말했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고석정으로 향했다. 고석정은 한자 '외로울 고'와 '돌석'을 합친 고석과 그 옆에 옛 임금이 경치를 즐기기 위해 두었던 정자를 합친 말이다. 그 말처럼 고석정에 도착하자 강 가운데 거대한 돌이 있고 그 옆에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석정은 사진에서 느꼈던 것보다 작았다. 고석정의 진정한 묘미를 느끼려면 통통배를 타야 한다. 선착장 안으로 가니 거대한 선풍기 여러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굉장한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에는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고 입구 바로 왼편에 선착장 매표소가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해야 하나. 책상 하나로 구색을 갖춘 듯한 매표소에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계좌이체로 할게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매표소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냥 5천 원만 주세요." 라고 말했다. 원래라면 6천 원을 내야 하는데 계좌이체로 하겠다고 하니 깎아준 것 같다. 내가 계좌이체를 하는 동안 그는 탑승 장소로 이동하더니 들어오는 배를 지켜봤다. 사람들이 결제를 하는지도 확인 안하는 모습에 괜히 내가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사람 좋으면 되나. 계좌이체 한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안심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차례가 되어 배에 탑승했다. 가족 단위로 여행을 온 분들이 대부분이라 그 사이에 낀 꼴이 된 나는 혼자 뻘쭘해했다. 통통배를 타면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배의 경로는 선착장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이동 후 왼쪽으로 이동했다 선착장에 돌아오는 순이었다. 통통배를 모는 남자는 주변 경관을 소개하면서도 주변의 손님들을 짓궂게 놀리면서 분위기를 화기애개하게 했다. 한 바퀴를 돌고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왼편에 앉은 젊은 남자가 조타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보이는 배는 오른쪽으로도 가네요. 우리는 왼쪽만 가나요?"
응? 방금 오른쪽으로 갔다 왔는데.. 맞은편 중년 여자가 말했다. 맞아 맞아 우리 방금 왔다 갔어. 아이고 졸았나 보네.. 배에 있는 나머지 이들도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조타수는 특유의 놀리는 말투로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아.. 이거 내가 이렇게 설명하는데 졸고 말이야.. 안 되겠네.. 학창 시절에 꽤나 졸았겠구먼"
그 뒤에 젊은 남자의 말은 압권이었다.
"하하.. 그래도 졸음운전은 안 합니다."
조타수와 젊은 남자의 티키타카에 배에 있는 모두가 박장대소를 했다. 모르는 이들 앞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은 적이 얼마만인가. 함께 웃음을 공유하는 이들만이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이었다. 고석정에서 다음 목적지를 향하면서 이름 모를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어떤 여행지는 그저 그랬다면 어떤 여행지에선 내 안이 가득 채워질 정도로 좋았던 때가 있다. 그 차이는 여행지에서 사람들과 어떤 교류를 했냐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로부터 배려와 친절을 경험했다. 매표소의 중년 남성처럼 원래 값보다 싸게 쳐서 준다거나, 덤으로 무언가를 더 받거나, 모르는 이로부터 친절히 길을 안내받거나 등등. 나는 이들의 친절에 '감사해'하면서도 '어쩌다 받는 운'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었다. 이들의 친절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무관심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친절함은 귀하다. 이런 세상 속에서 친절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도 타인에게 친절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리라. 이런 마음이 삶을 충만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쉬는 날 손에 잡히는 것들을 펼치다 오래전 썼던 글들을 읽었다. 엊그제 쓴 건가 싶을 정도로 내 안의 불안감과 우울함들이 섞여 있었다. 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지점에선 제자리걸음이었으니 말이다. 최근에 애착 형성과 관련한 책을 읽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유년기를 거쳐 안정형 애착을 형성한다. 어떤 이들은 유년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안정형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다.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어떤 결점이 아니라고. 유년기의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어릴 적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면서 회피형에 가깝게 성장했던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도 '언젠가 일어날 이별'이 싫어서 조금 거리를 두었다. 한 번은 사촌언니에게 울면서 얘기했던 적이 있다. "내가 감정이 없는 로봇인 것 같다고, 충분히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말이다. 책에서 회피형 사람들은 스스로를 '감정 없는 로봇이나 기계'로 칭한다는 문장을 봤을 때 소름 돋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이제 알 것 같다.
다행히도 인간은 안정형 애착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충분히 노력하면 안정형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설령 유년기의 삶을 바꿀 수 없더라도 삶의 다른 가능성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뇌는 마치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신경회로가 변한다. 나는 과거의 경험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삶을 상상했다. 만약 여전히 부모님이 함께 살았다면, 만약 아버지와 나의 사이가 좋았다면. 그건 그동안 생각해 본 적 없던 삶이었기 때문에 낯설었다. 하지만 분명 그 삶에서 나는 끈끈한 가족 안에서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회피형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둘러싼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마음속의 장소를 말한다. 안전지대에 좋아하는 사람들로 채워놓는 상상을 한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주었던 A언니, 나의 미지근한 온도라도 좋다고 얘기해 준 친구 K, 언제나 잘하고 있다고 지지해 주는 우리 언니, H언니,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중요한 경사날은 꼭 챙겨주는 대학 친구들. 이들과 함께 하는 내 모습은 한결 편하다.
지금까지 나는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집착에 일에서, 삶에서 어려움이 있으면 쉽게 흔들렸다. 그 감정과 생각들은 내 지난 글에 묻혀 있다. 이젠 좀 지겹다. 너무 오랫동안 이 궤도를 돌고 돌았다. 나는 아마도 또 슬픔에 빠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전지대로 돌아가 슬픔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그를 안아주리라.
잘 왔어.
너에게 해줄 말이 정말 많아.
너를 사랑하는 이들과
너의 삶에 뿌리내린 추억들과
네가 희망차게 말했던 미래에 대해 얘기해주려 해.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극복해 낼 것이다.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글에는 더 이상 과거의 슬픔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운 삶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길.
한 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뿌리가 이곳에 단단하게 박혀 있음을 안다. 그러니까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고 가지를 뻗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이 아름다울지 추악할지, 내 선택이 다행스러울지 후회로 남을지 모르겠지만.
<젊음의 나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