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서 정가제 위반
프랑스의 도서정가제는 단순히 책값을 규제하는 제도를 넘어,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 소규모 출판사와 서점의 생존을 보장하려는 포괄적인 정책입니다. 이 제도는 1981년 랑법의 도입과 함께 전통적인 출판 산업의 구조를 유지하려는 강력한 의지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글로벌 플랫폼의 확장은 기존의 규제 체계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오늘날 도서정가제는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도전 과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출판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도서정가제는 디지털 콘텐츠와의 충돌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자책과 웹툰 등 디지털 콘텐츠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프랑스의 강력한 법적 규제 때문에 디지털 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프랑스 만화 산업의 디지털 비율은 5% 미만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일본이나 미국의 디지털 시장 점유율과 큰 차이를 보이며, 전통적 출판 산업 보호라는 장점과 함께 디지털화의 속도를 늦추는 단점도 드러냅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출판 정책이 세계 시장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규제 모델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1979년, 프랑스 도서 시장은 중대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당시 르네 모노리(René Monory) 경제부 장관이 주도한 '모노리 법령'은 도서 권장 가격제를 폐지하고 '순수 가격' 체제를 도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대통령의 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모노리 장관은 도서 가격의 자유화를 통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독자들의 구매력을 증대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책도 다른 상품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펼치며 정책을 옹호했지만, 이로 인해 프랑스 문화계에는 큰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출판계와 서점계는 이 법령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형 출판사와 유통업체들은 가격 경쟁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기회로 보고 법안을 지지했습니다. 특히 FNAC과 같은 대형 문화상품 유통업체들은 정책의 도입을 환영했습니다. 일부 독자들 또한 책값 인하를 기대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중소 출판사와 독립 서점들은 이 법안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법령 시행 이후 프랑스 도서 시장은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20~40%에 이르는 대규모 할인 경쟁을 벌이면서 중소 서점들이 잇따라 문을 닫게 되었고, 1979년에서 1981년 사이 파리에서는 약 30%의 서점이 폐업했다는 통계도 나왔습니다. 출판계에서는 베스트셀러 위주의 출판이 증가했으며, 문학성이 높은 작품들의 출간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독자들은 단기적으로 책값 인하의 혜택을 누렸으나, 동네 서점 감소와 책의 다양성 축소라는 부작용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위기감이 커져갔습니다.
혼란의 여파 속에서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후보는 "문화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도서 정가제 부활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미테랑은 자크 랑(Jack Lang)을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하며, 곧바로 도서 정가제 법안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출판인이자 작가였던 자크 랑은 "책은 예외적인 상품이다"라는 철학을 기반으로 도서 정가제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2010년 한국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을 맺기도 했습니다. 결국 1981년 8월 10일 제정된 '랑법'은 이듬해인 1982년 1월 1일부터 시행되며 프랑스 도서 정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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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랑법은 출판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로, 모든 도서는 출판사가 정한 정가로만 판매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규정은 출간 후 2년까지의 신간과 이후의 구간 도서 모두에 적용되며, 소매상은 정가의 최대 5%까지만 할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베스트셀러에 대한 과도한 할인 경쟁을 억제하고, 소규모 출판사와 독립 서점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만, 도서관이나 학교에 공급되는 도서나 출간된 지 2년 이상 지난 재고 도서의 경우에는 더 큰 폭의 할인이 허용됩니다.
2014년에는 '반아마존법'이 제정되어 온라인 서점에 대한 규제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이 법에 따라 온라인 서점은 도서 정가에 대해 어떠한 할인도 제공할 수 없으며, 무료 배송 또한 금지됩니다. 대신, 배송비에 대해서는 정가의 5% 이내에서만 할인이 허용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아마존과 같은 대형 온라인 유통업체가 가격 덤핑을 통해 소규모 서점에 끼치는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되었습니다. 또한, 온라인 서점은 배송비를 별도로 명시해야 하며, "1유로 배송"과 같은 표현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프라인 서점의 경쟁력을 높이고, 도서 시장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도서 정가제는 전자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디지털 시대에서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시행된 전자책 정가제에 따르면, 출판사는 전자책의 정가를 자유롭게 책정할 수 있지만, 한 번 책정된 가격은 모든 판매처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할인 제한이 없지만, 이 경우에도 출판사의 동의가 필요하며 할인된 가격은 모든 판매처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규정은 디지털 환경에서도 출판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문화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을 잘 보여줍니다.
강력한 도서정가제는 프랑스 디지털 시장의 성장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만화 시장에서 디지털 콘텐츠의 점유율은 5% 미만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디지털 만화 비율이 70%에 육박하는 일본 시장과 비교할 때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는 전통 출판 산업을 보호하려는 프랑스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규는 디지털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며, 출판 시장의 기술적 진보와 소비자 접근성 향상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과 전통적 출판 산업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프랑스에서 웹툰 플랫폼들의 가격 정책이 도서정가제를 위반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논란은 2022년 4월, 한국의 웹툰 플랫폼 픽코마가 프랑스 시장에 진출한 직후 프랑스 도서 중재자(Médiateur du Livre)의 조사로 공론화되었습니다. 한국 웹툰 플랫폼의 코인 시스템, 기다리면 무료, 그리고 할인 프로모션이 모두 프랑스 도서 정가제를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이들 정책은 도서정가제의 "모든 소비자에게 동일한 가격 제공" 원칙에 반하는 사례로 간주되며 현재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픽코마를 포함한 웹툰 플랫폼들은 '코인 또는 쿠키'라는 가상화폐를 통해 독자들이 웹툰과 만화를 구매하거나 열람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코인은 대량 구매 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광고를 시청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는 등 플랫폼 내 활동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코인 시스템은 동일한 작품의 실제 가격이 사용자마다 다르게 책정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도서정가제는 모든 판매처에서 동일한 가격 책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코인 기반의 가격 변동은 정가제 위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지적받고 있습니다.
특히, 코인 시스템 외에도 "기다리면 무료(Wait Until Free)" 모델 역시 논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모델은 독자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료로 콘텐츠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여, 정가제의 "모든 소비자에게 동일한 가격" 원칙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플랫폼에서 특정 콘텐츠에 대해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방식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2023년 9월, 중재자는 코인 시스템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출판사가 유로화 기준으로 명확한 가격을 설정하고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한국에서 웹툰 산업의 성장을 견인했던 회차 할인, 충전 할인, 기다리면 무료, 광고 보면 무료 등의 혁신적인 가격 정책이 프랑스에서는 강력한 도서정가제와 충돌하며 불법 논란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프리미엄(Freemium) 모델은 프랑스의 도서정가제를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웹툰 플랫폼들은 프랑스 당국과 협력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 중이지만,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통 출판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도서정가제는 디지털 만화 시장의 독창적 비즈니스 모델과 충돌하며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