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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Jul 13. 2020

당신이 몰랐던 현대미술 감상 1

현대미술 읽어내기

 흔히 현대미술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미술이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글과 책도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들마저도 어렵습니다. 왜 미술사 이야기를 하는지, 왜 그렇게 머리를 굴려야 알 수 있다고 말하는지, 그렇게 할 거였으면 진작에 미술사 책을 읽었을 겁니다. 이 문제는 작가에게도 적용됩니다. 자기 작품을 많은 사람이 봐줬으면 하고, 재미도 느끼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하는데 막상 관람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보고 갑니다. 조금 예쁘면 사진이나 찍고 갑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작가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미술을 통해 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을 택한 것이 맞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보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것 같으면 괜히 골머리 썩이지 않고 지나가면 된다고 말입니다. 도슨트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으면 좋은 것인데, 재미도 없다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상식도 아닐 뿐더러,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도 괜찮았듯, 앞으로도 몰라도 상관 없는 것입니다. 이게 현대미술의 정체입니다. 당신이 인터넷 방송 트위치에서 스트리머들의 관계를 모르는 것처럼, 동네 분식집 인테리어가 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그냥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흔적일 뿐입니다. 관심이 간다면 주의 깊게 봐주고, 안 가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현대미술을 즐기고 있습니다. 아주 가볍게, 굳이 머리 아프게 골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가 현대미술이 어렵다거나 부자들의 돈놀이라거나 점 하나 찍고 의미만 잔뜩 붙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미술은 감상하기에 가볍게 감상해도 되는 것이 본래 정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말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흔히 아는 미술사조가 있습니다. 인상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이란 주로 이 세 사조 안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외에는 2020년 현재의 일러스트, 디자인, 인테리어가 있습니다. 또는 인스타그램 등지에서 퍼지는 젊은 작가들의 힙한 그림이 있습니다. 인상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는 어렵고, 일러스트는 귀엽고, 디자인은 세련됐습니다. 그러면 현대미술은 어떨까요?


 현대미술은 어떤 말로 묶어둘 수 없습니다. 인상주의 같은 말은 이미 100년 전에 끝난 말입니다. 일러스트, 디자인은 제작 목적과 용도에 따른 분류입니다. 그러면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핀터레스트에 올라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현대미술일까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현대미술은 정하기에 달렸습니다. 어떻게 정하느냐,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미술관과 갤러리에 있는 것이 현대미술입니다.


 사실 현대미술은 ‘현대미술은 무엇인가’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도 현대미술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것은 1900년대 중반부터 이어져 온 생각입니다. 미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입니다. 과거에는 물감과 붓으로 멋진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었다면, 물감이 여기저기 튀긴 것도 미술이고, 심지어는 대충 휘갈긴 분필 자국도 미술이 되었습니다.

싸이 톰블리라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리움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크기가 제법 크고, 미술관 분위기와 어우러져 이렇게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미술은 아주 쉬우면서 어려워졌습니다. 이 말부터가 복잡해 보입니다만 당장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커다란 백지를 들고 연필이 한 자루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지 고민에 빠져듭니다. 또한 오랜 시간을 들여 작품을 완성한다 해도 이게 미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며 지레 고민에 빠집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살던 동네가 재개발 구역이 되어 온통 경관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미술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만약 너무 그립고 아련하여 미리 찍어둔 사진을 보고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러면 현대미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백 년도 전의 작품,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입니다. 열차 삼등석 칸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습니다. 이 작품이 나오기까지 이런 가난한 사람들을 화폭에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그림으로 그린 것만도 충분히 센세이셔널한 것입니다. 또 그랬기에 사회비판이 가능합니다. 당시 통용되던 미적 기준은 신, 귀족, 왕, 성스러운 장면이었지, 이런 가난뱅이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그린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의 삶도 부유한 사람들의 삶만큼 가치가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재개발에 사라지는 동네 풍경이 아쉬워 그림으로 남겨둔 것은 어떨까요? 아쉽게도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이미 사진으로 찍어둘 수도 있고, 재개발이 주는 향수는 수도 없이 표현됐으며, 그 장면을 그린 것만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유치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미를 붙일 수는 있습니다. 재개발이 이뤄지는 한국 현실과 이 속에 사라지는 풍경들을 우리 동네라는 상징성을 담아 그려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여러 가지 요소를 넣어야 합니다. 예컨대 깡통차기를 하는 아이들이나, 야채장수 트럭이나, 과거의 구청 후보 선거 유세 장면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넣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문제입니다. 더 시선을 끌 부분을 정하고 집중하든, 동네의 모습을 더 아련하고 노스탤직하게 색을 쓰든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그려내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미술이 미술관과 갤러리에 걸리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사라진 우리 동네 풍경을 그린다고 해서 갤러리에 걸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돈을 주고 전시를 할 수는 있습니다만 갤러리도 자기의 명성을 생각하면 안 걸어줄 확률이 높습니다. 오늘날 미술작품을 발굴하고, 주목하도록 만드는 것이 미술관과 갤러리의 역할입니다. 갤러리가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낸다는 것은 더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있는 작품, 앞으로가 기대되는 작가를 선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현대인이 그린 그림이다 하고 아주 폭넓게 정의하는 것이 아닌,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접어듭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미술계 사람들이 정답이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저는 이 문제가 한국에 가장 크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학연, 지연으로 얽혀 별로 좋은 작품이 아님에도 미술관과 갤러리에 걸리는 것입니다. 각종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고쳐야 할 문제입니다. 고쳐지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현대미술은 ‘동시대미술’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시대에 있던 미술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표현 방법으로 어떤 작품을 하든, 그것을 인상파니 입체파니 하고 묶어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대미술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시대적으로 현대미술이라 함은 과거와 대비되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작가들은 이런 것을 크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르누보 양식으로 작품을 하더라도 그 내용과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백지와 같습니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를 통칭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동시대에 하는 미술이다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동시대미술은 주제로 분류하곤 합니다. 작가들이 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를 보면 동시대미술을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공감할 만한 주제, 평소 생각하던 주제의 작품을 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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