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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May 21. 2020

미니멀리즘에서 무엇을 봐야 하나요?

미술 작품 읽어내기

이 작품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이게 작품이기는 할까요? 미술관에 있다면 작품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대체 이걸 왜 만들어놨을까, 그냥 인테리어 장식품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에 ‘미니멀리즘 아트’라는 말이 붙으면 괜히 심오해 보이기도 하고, 역시 현대미술이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부터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은 정말 흔히 쓰입니다. 미니멀이란 말은 심플하고, 깔끔하고, 잡다한 것을 뺀 것들에 붙습니다. 장식이나 문양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민무늬로, 색이나 간단한 형태만 들어간 것을 뜻합니다. 필수적인 기본 요소만 남겨놓는 것에 미니멀이란 말을 씁니다. 카페 인테리어에도, 핸드폰 케이스에도, 심지어 생활마저도 필요 없는 것들을 판단해 모두 버리곤 합니다. 미니멀리스트죠. 그런데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조금 다릅니다. 1980년대에 등장했던 미니멀리즘은 미술계의 종말을 가져왔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도널드 저드라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아주 유명한 작가고, 리움 미술관에 가도 이 사람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며 ‘도널드 저드라는 작가의 작품이다’라고 한다면 작가는 싫어할 겁니다. 의도와 전혀 다른 일이 됩니다.


이 작품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파란색 상자가 벽에 붙어있을 뿐입니다. 뭘 봐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이 당연합니다. 보통 하는 감상이란 아래 같은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니까요.

이 그림을 보면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사람들이 잔뜩 있고, 가운데 여자가 눈에 띕니다. 뒤에는 구름이 솟으며 아기천사들이 날아오르고요, 뿔피리를 부는 걸 보니 뭔가 축제 분위기입니다. 바닷가에서 여성이 등장하는 것, 이건 분명 비너스의 탄생일 겁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그리는데 그려진 신체들이 참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말까지도 근육이 빵빵하네요. 천과 피부의 묘사와 색채로 봐서 참 이상적이며 잘 그린 그림입니다. 분명 그리스 신화와 인체 묘사, 색감 등을 고려해 보면 르네상스 직후의 그림일 것 같네요. 신이 중심인 시대가 끝나고 인간이 중심인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런 식의 감상이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상하기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는 그림이 편합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작품들은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뭔가 심오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하지만 아무것도 볼 게 없습니다.


보는 것과 감상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관객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감상을 하죠? 여기에 대한 의문이 미니멀리즘을 이해하는 시작이 됩니다. 위의 그림을 보고 저는 비너스 신화라든지 인체를 보고, 색을 보고, 르네상스를 떠올렸습니다. 이것이 감상일까요? 미니멀리스트들의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그림을 보되, 저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도구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그림에 덧씌워진 여러 이야기를 봤습니다. 그러면 그림은 대체 뭘까요? 앞에 놓여있지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림으로 인해 유발되는 생각을 본 것이죠.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합니다. 공장 노동자들의 그림을 보고 시대상을 읽어내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하고, 실제 현실에 대입하여 비판적인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지난 글에서 봤던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입니다.

저는 이 구두를 보고 구두를 신었던 주인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 구두가 그려질 수 있었던 맥락도 떠올립니다. 끈이 풀려있고, 헤진 것을 보아 참 고된 삶을 살던 사람의 구두구나 하고 그 삶을 떠올립니다. 구두를 그 자체로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두 자체라는 말도 이상합니다. 이것은 물감이 칠해진 것이며, 여러 방향이 붓질 자국도 있고, 색의 조화나 배경 같은 요소도 있는데 저는 구두만 봤습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멋진 산 능선에 올라 하늘과 산을 보고, 절벽에 올라 드넓은 바다를 마주하고, 떠오르는 해와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볼 때 그 장면에 빠져든 경험이 있을 겁니다. 없다면 대자연을 한 번 마주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니 꼭 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때 자연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느낍니다. 그런 다음 지나간 추억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올리기도 하는데요. 미니멀리스트가 지적한 것은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진정한 감상, 작품 보기가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단지 매개체로 앞에 둘 뿐이거나, 거기에 덧씌워진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위의 미니멀리즘 작품을 앞에 두고는 무엇을 봐야 할까요?

봐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그것 자체를 느끼면 됩니다.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고민은 ‘그림에 씌워진 여러 이미지를 어떻게 제거할까’입니다. 여기서 여러 이미지란 비너스의 탄생 신화, 구두라는 이미지,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 떠올리게 하는 연관된 다른 이미지들입니다. 그러니까 작품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없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본질로 들어간 것입니다.


미술 작품의 본질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비판정신이라 하겠고, 누군가는 순수한 미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미니멀리스트들의 답은 색과 형태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색과 기본적인 형태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없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그렸을 때, 그것이 물감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그라미 두 개와 길쭉한 선이 하나 있다면 두 눈과 코로 사람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이런 간단한 연상작용조차 없애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미술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미니멀리즘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연상을 할 수 없는, 선과 형태 그리고 색으로만 이뤄진, 본질에 다다간, 근본에 순수하게 부합하는 미술 작품입니다. 미술 작품이 다른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경계하며, 그 물성 자체에 집중하여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배기 순도 100% 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미니멀리즘 작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봐야 할까요? 볼 필요가 없습니다. 흔히 관객이 ‘본다’라고 할 때, ‘감상한다’라고 할 때, 연상되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거울이 있고, 반짝이고, 정육면체 형태임을 느끼면 되는 것입니다. 눈 앞에 마주하고, 그것의 성질 자체의 느낌을 받으면 그걸로 된 것입니다. 오래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래 본다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떠오른다면 미니멀리즘 작가들의 의도가 실패한 것이고, 떠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 느낌이 없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다만 무슨 느낌이 있다면 그 느낌을 받았다고 느끼고 지나가면 되는 일입니다.


보다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하고 보는 것이지,  물은 인생이요,  산은 어린 시절 추억을 뜻한다 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물과 산을 두고 인생과 추억을 보지 않고, 물과 산을 그대로 봅니다.


그러니까 도널드 저드의 작품을 본다 하더라도 저드의 인생이나 생각을 알 필요도 없습니다. 벽에 붙은 색깔 상자를, 그 배열을 그저 느끼고 지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까지 생각했을까요?


1900년대 초반, 미술의 격동기, 모두가 아는 인상주의부터 입체주의, 야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의 수많은 미술 사상들을 거치고 나니 무엇이 미술인지 헷갈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가 되면서 팝아트가 나오고, 키치도 등장했습니다. 미술이란 고귀한 자들의 고귀한 작업이자, 가난한 서민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업이자, 빛과 색의 치열한 탐구의 장이자, 원시미술과 동양미술이 합쳐지며 새로운 미학을 드러내는 장이었는데 그걸로 모자라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들까지도 미술로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도 미술이랍니다. 그 행위가 미술이라면서 말입니다.

미술가라면, 이 지경이 되면, 정말 미술이란 무엇일까, 미술의 본질이 무엇일까 한 번쯤 떠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물감을 휘갈겨 튄 자국도 미술작품이라면 그 미술작품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그냥 프린트해놓고, 통조림 프린트해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색과 형태, 재료의 물성에 집중합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빼버립니다. 미술 작품이란 작품의 성질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고, 그것을 느끼는 게 감상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이 미술계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할 거 다 해봤다, 사회 비판도 했고, 시대상도 드러냈고, 조형미의 극한도 탐구했고, 액션도 해봤고, 세상에 없는 초현실적인 장면도 그려봤고, 아프리카/호주/인디언/동양의 미술도 다 접목했고, 과학적인 시각 현상을 이용도 해봤고, 그냥 변기 가져다 작품이라고도 우겨봤고, 쓸모없는 쓰레기로도 미술 해봤고, 쓸 수 있는 재료는 다 써본 것 같다, 거기에 예술 자체의 모든 형식을 파괴하는 다다이즘도 해봤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을 없애 재료와 색과 형태 자체를 즐기는 미니멀리즘까지 도달했다. 그러니까 이제 미술은 끝났다, 모든 것은 아류이며 반복일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니멀리즘으로 미술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재료와 색과 형태로 할 수 있는 것 다 해보고, 그 자체를 느껴보라고 미니멀 작품까지 다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미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이 활동 중입니다.


아무튼 미니멀리즘 작업에서 관객은 그저 앞에 서서 색과 형태와 재료의 특성을 느끼면 끝이 납니다. 그런 경험은 현대인에게도 생소합니다. 허나 2020년, 현재에는 조금 익숙해져 갑니다. 시멘트와 철골이 그대로 드러난 인테리어의 카페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바로 1980년대 미니멀리즘 미학을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대중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선반을 놓아 아기자기 장식을 하기는커녕 페인트칠도 안 하고, 벽지도 안 바르고요. 흔히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그러니까 미술계의 미니멀리즘과 조금 달랐습니다. 그저 필요 없는 것을 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본질을 느끼기 위해 다른 요소를 없애는 것입니다. 말장난인 것 같지만 분명 다른 이유입니다. 지저분해 보여서 깔끔하게 만드는 것과 본질을 보기 위해서 닦아내는 것은 다르니까요. 같은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니멀리즘 작업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낯섭니다. 뭘 봐야 할지 모릅니다. 봐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물감을 보고 물감의 성질을 느낄 때 미니멀리즘 작업을 감상하는 것이 됩니다.

칼 안드레라는 작가의 144개의 마그네슘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마그네슘판을 보고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보고 느끼고, 밟아보면 더욱 좋겠죠.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가면 칼 안드레의 작품이 있습니다. 저는 과감하게 밟고 만져보며 마그네슘을 느껴봤습니다. 미니멀리즘 작품이니까요. 그 물성을 느껴보며 뭔가를 봐야 한다는 데에서 벗어나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애쓰지 않으면 본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의 본질이 정말 물성과 색과 형태, 그걸로 족할까요? 여기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아직 미술의 종말이 오지 않았겠죠.


참고로 이 사람의 작업은 다 이런 식입니다. 벽돌이나 나무토막, 알루미늄이나 철판을 깔아놓으면 끝입니다. 잃어버리면 다시 만들어서 놓으면 되고요, 작업을 옮길 때 그냥 들어서 모아가지고 옮기면 됩니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색깔 있는 재료의 형태만 남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전히 작품 감상도 어려운데 무엇을 남겼을까요?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카페에 가서 꽤 세련됐다고 느낍니다. 아무 무늬도 없는 그저 커다란 정육면체를 두고 의자라고 해도 깔끔하고 멋진 센스의 인테리어가 됩니다. 장식 하나 없는 액세서리를 보고도 그 금속의 느낌을 잘 살린 작업물로 느낍니다. 금속이든 나무든 그것으로 무언가 만들어내야만, 그것은 그저 재료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메인 주인공이 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아닙니다. 현대인은 미니멀리즘 미학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행까지 타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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