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묵은 엠피쓰리
까마득한 기억 속, 첫 애플 기기는 아이팟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팟도 종류가 많은데 클래식이었습니다.
당시 중고로 샀습니다. 돈도 없었고, 중고라도 크게 상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요즘이야 당근마켓이지만 그때는 중고나라가 일등이었습니다. 여러 제품을 알아 보며 사기 안 칠 것 같은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때 구입했던 것을 보면 가격도 꽤 괜찮았을 걸로 생각합니다. 언제 어떻게 받고, 처음 사용을 시작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뚜렷이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시리얼넘버를 조회해 보니 보증은 진작에 끝났고, 유상 리퍼만 가능했습니다. 어리고 바보 같았던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판매자에게 확실하냐 물어 보고, 애플컴퓨터에 한두 번 전화를 했을 뿐입니다. 학교 면학실 앞에서 서성이며 애플에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사용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음악 잘 들어갔고, 재생 잘 됐고, 휠도 잘 돌아갔고, 화면도 잘 나왔습니다. 그러니 사기 당한 거 어쩔 수 없지 뭐, 하면서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아이팟이 뭐야? 아이폰 아니야?’라고 한답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물어 볼 걸 그랬습니다. 이런 기기를 지금 쓸 이유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80기가의 용량 (120기가, 160기가 모델도 있었습니다.), 커버플로우의 ‘감성’이 있어 아주 매력적인 MP3 Player였습니다. 최근에도 아이팟 클래식이 고가에 팔리며 그때 그 감성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매매가 잘 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소유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합니다.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 듣고, 하다 못해 음반CD를 구입해 CDP에 넣어 듣던 시절입니다. 제가 그 세대는 아닙니다. 저는 mp3 플레이어 세대입니다.
아날로그 감성이 궁금해 음반을 모으기도 했고, 리핑을 해서 듣기보다 중고 CDP를 하나 구입해서 듣자며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보다도 저에게 예전 감성이라 하면 바로 이 아이팟 클래식입니다. 지금이야 스트리밍 앱에서 터치 몇 번으로 편하게 음악을 듣지만 아이팟 클래식에 음악을 하나하나 넣어 물리 버튼으로 조작하며 하나하나 찾아 듣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스트리밍과는 전혀 다른 감성입니다. 내가 모은 음악을, 내 손으로 조작해서 듣는 맛입니다.
보통은 빤질빤질, 번쩍번쩍한 깔끔한 스뎅 후면을 좋아하지만 저는 이 긁히고 긁힌 후면이 훨씬 좋습니다. 우습지만 살아온 흔적이 남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온통 긁히라고 맨질한 스테인리스 후면을 만든 게 아닐까 합니다. 중고로 팔 생각이 없다면, 오래 쓸 생각이라면 이렇게 기스가 잔뜩 난 후면이 더 멋진 것 같습니다. 가죽을 두고 에이징이라며 손때 묻는 것을 자연스레 생각하는 것처럼 스뎅에도 기스는 에이징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기스가 날 동안 아이팟 속에는 수천 곡의 음악이 쌓였습니다. 78기가, 8천 곡이나 됩니다. 이렇게 많은 노래를 다 들어 봤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넣어 두고 듣지도 않은 음악이 참 많은데, 그걸 수집한 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이라도 한 번 봐두면 어디서 아는 척이라도 한 번 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 알고 있습니다.
최근 아이폰에 들어간 음악의 태그 정리를 싹 다 했습니다. 앨범 커버 이미지부터 곡명, 아티스트명, 앨범명, 트랙넘버까지, 전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깔끔한 정리를 한 번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팟 클래식도 배터리가 살아난 만큼 한 번 날잡고 해야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오늘 수리를 하니 어젯밤 듣지 않을 노래를 잔뜩 지워버렸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엄청난 양이 남았지만, 그 정리 작업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폰에 있는 음악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 방법도 찾아 봐야겠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해 아이팟 클래식을 한 번씩 써보려 했습니다. 10년, 11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꾸준히 쓰지 못했습니다. 불편한 이유입니다.
불편함 이전에 새로운 기기가 생긴 것도 한몫 했습니다. 아이팟 터치가 생겼습니다. 용량이 80기가 vs 8기가로 10배 차이가 났지만, 아이팟 터치는 그야말로 혁신이었습니다. 수많은 앱을 돌릴 수 있었고, 음악 앱에서도 훨씬 간지가 났습니다. 슥슥 스크롤을 해서 음악을 듣는 것, 물리 버튼이 없는 멋은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는 아이팟 클래식을 쓸 이유가 더욱 없어졌습니다. 인터넷 서핑도 하고, 유튜브도 보고, 메신저, SNS도, 카메라도, 온갖 것을 해야 하는데 귀찮고 번거롭게 아이팟 클래식을 따로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저는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는데 한쪽에는 스마트폰을, 한쪽에는 에어팟을,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갤럭시 기어 아이콘 X 2018 (희대의 망작)을 쓰면서는 더욱 아이팟 클래식에 손을 대기 어려웠습니다. 무선 이어폰을 쓰니 선이 있는 이어폰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폰의 선은 없어져야 마땅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이팟 클래식에 점점 소홀해지면서도 꿋꿋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다운 받아 듣는 편인데, 클래식에도 착실히 채워 넣었습니다. 30핀 케이블이 없어 근처 모바일 액세서리 가게를 뒤져 가며 어떻게든 구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듣지는 않더라도 생각이 날 때면 꼭 엄선한 음악을 넣어 뒀습니다. 그러나 소홀함을 눈치챈 것인지 배터리가 점점 맛이 갔습니다. 음악을 한 시간도 듣기 어려워지고, 이제는 삼십 분도 간신히 재생했습니다. 또 배터리가 부풀어 액정 화면이 눌렸습니다.
종종 사용을 꿈꿨지만 이제 그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지경에 왔습니다. 이삼 년 전부터 배터리를 교체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Fixit을 들어가 수리 도구, 수리 방법을 찾아 보기도 했고, 집 근처 수리점을 찾아 보기도 했습니다.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잘 쓰지도 않는데 괜한 돈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삼 년이 지난 것입니다. 분기마다 떠오르는 아이팟 클래식이었습니다. 이제는 써보려 해도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수리를 결정했습니다. 매번 떠올리며 쓰고 싶다고 생각할 바에 진짜 수리를 해버리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몇 군데 수리점을 알아 봤습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수리해야지 하면서 찾아 뒀기 때문입니다. 두 군데를 정해 가격을 알아보고, 12000원 더 저렴한 곳으로 갔습니다. 20분 정도의 수리가 끝나고, 이제 다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리 기사 아저씨께서 완충 한 번 하고 사용하라 하셔서 충전도 완료했습니다.
문제는 마땅한 이어폰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어 아이콘부터 에어팟까지 무선 이어폰을 쓰면서 유선 이어폰은 번들 외에 쓸 만한 것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에 하나 살까 싶습니다.
나이가 많지도 않지만, 얼마 되지도 않는 나이에도 갈수록 한 번에 여러 개의 작업을 하기가 어려워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친구도 별로 없어 막상 폰을 들여다 볼 일이 적고, 유튜브를 워낙 많이 보다 보니 이제 더 볼 영상도 없어지고 있습니다. 에어팟 프로가 있지만, 노이즈캔슬링이 있지만, 종종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이 생기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이팟 클래식 배터리를 교체한 이유가 음악 감상을 해보자는 본격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매번 떠올릴 바에 한 번 수리를 해놓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리를 해 놓은 김에 음악이나 듣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어폰이 필요하겠습니다. 돈을 또 쓸 일이 생기다니,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