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읽기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관자재보살은 중생을 돌보고 구제하는 보살입니다. 중생이란 매순간 괴로움을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흔히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말을 쓰는데 어리석다는 건 비난조가 아니라 단지 모른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매순간 괴로움을 반복한다는 것을 모르고, 괴로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그런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모름을 깨우쳐 알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괴롭지 않아도 되는데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한다면 알려 줄 수도 있는 법입니다. 물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에게 그저 막대 하나를 건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살이라 합니다.
보살은 깨달은 사람입니다. 보살이 깨달은 바는 괴로움의 원인이고, 그리하여 괴롭지 않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면 휘둘리지 않고, 굳이 거기에 연연하여 끌려갈 필요가 없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괴롭지 않은 사람이 괴로워 하는 사람에게 나오라고 손을 건네는 것입니다.
자비심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음보살, 관세음보살과 같은 말입니다. 이 보살의 앞에는 '대자대비'가 붙습니다. 자비가 아주 커서 대자대비입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고, 보통은 그러지 않음에도 괴로워 하는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괴로움을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전생에 말이었고, 파리였고, 대왕이었고, 다음 생에 소로, 공주로, 개구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의 윤회는 비유일 뿐입니다. 어제의 나로 인해 오늘의 나라는 결과가 나왔고, 오늘의 내가 원인이 되어 내일의 내가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어제의 나로 인해 오늘의 내가 괴롭고, 오늘의 내가 괴롭기 때문에 내일의 나도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이러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입니다. 삼세의 업을 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세는 과거/현재/미래를 말하고, 업은 반복되는 나의 습관, 사고방식, 괴로움을 찍어내는 컨베이어벨트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괴롭지 않게 된다면 어제의 괴로웠던 나는 없던 일이 되며, 오늘 괴롭지 않기에 내일의 나도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괴로움의 고리를 지금 끊어내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삼세의 업이 사라집니다.
해탈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몸을 찢는 고행도 해보고, 쾌락을 추구하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 가만히 앉아 해탈을 이뤘습니다. 그 비결은 그저 아는 것입니다. 지혜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저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 했던 것이고, 알고 나니 더는 괴롭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것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습니다. 수십 년 살아오며 반복해 온 업식은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석가모니가 나무 아래에 가만히 앉아 며칠 만에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오랜 시간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몰두했습니다. 출가를 하기 전부터 그랬습니다. 그 끝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동안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신처럼 위대하고 특별하고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손가락 한 번 튕겨 악귀를 물리치고, 한강을 단숨에 뛰어넘는 게 아니라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단지 말로 읊는다는 것이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고 항상 그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안 됩니다. 저도 해탈을 위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항상 지혜를 머릿속에,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항시 알고 있다는 겁니다. 절에 가면 종에 물고기가 달려 있습니다. 물고기는 항상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처럼 항시 깨어 있자는 의미로 물고기를 달아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깊은 반야바라밀다가 무엇이고, 행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괴로움은 왜 생겨나느냐 하는 내용입니다.
금강경에는 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나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구제했다면서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말이 처음에는 어렵게 다가옵니다. 사실 보살에겐 중생이란 분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분별이란 말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위에 '어리석은 중생'이란 말을 흔히 사용한다 적었습니다. 이 표현은 보통 누군가 멍청하고 한심한 짓을 했을 때 '아이고, 어리석은 중생아' 하며 사용합니다. 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흔히 생각하는 중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반야바라밀다를 모를 뿐이지, 모르다 해서 중생은 어리석고 한심하며 멍청하고, 보살은 위대하고 특별하고 대단한 신이 아닙니다. 코스타리카의 수도를 안다고 해서 보살이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중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알면 코스타리카 사람과 한 마디라도 더 즐겁게 할 수 있겠습니다.
반야바라밀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로워하며 살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들 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괴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관자재보살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막대를 건네되 잡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한심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습니다. 같은 말로 모든 인간은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괴로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너도 나도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모든 괴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괴로워 하지 않도록 지혜를 전한다는 말이며, 한 중생도 구제한 바가 없다는 것은 그저 모르는 사람에게 알려줬을 뿐, 대단한 존재가 하찮은 미물을 천상으로 이끌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이라 함은 그저 모르는 사람을 일컫은 이름일 뿐이지, 거기에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걸 분별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관자재보살이 이천 년도 전의 사람인데 아직도 살아 있어서 중생을 구제할까요? 아니면 신의 세계에서 정말 화재를 막아주고, 강도를 막아주고, 우리의 삶을 돌봐주는 걸까요? 그렇게 믿을 수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불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기에 꼭 그런 뜻으로 전해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관자재보살이 정말 신처럼 인간을 돌보고 어른다 생각한다면 수없이 일어나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보며 관세음보살님을 탓하고 원망할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나에게 괴로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렇다고 '다 뜻이 있어서 그러신 거겠거니'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뜻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죽을 운명, 죽어야 세상이 돌아가기에 마땅히 죽어야 했던 그런 건 없습니다.
관자재보살은 모든 수행자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즉 제가 깨달음을 얻고, 자비심을 가지고, 거대한 원을 세워 다른 중생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면, 괴롭기 때문에 괴롭지 않을 수 있다면, 모르기에 알면 된다면, 알고 해탈한다면 제가 관자재보살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먼 옛날 부처님의 제자들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적고, 오늘까지 내려오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작이 관자재보살인 것도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대승불교인 점도 있고, 불교 역사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관자재보살이 되어 나쁠 일도 없지 않나 합니다.
반야심경은 불교 사상의 요체라고들 합니다.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요. 저도 불교를 잘 모르기에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살펴보면 정말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며 인간적입니다. 흔히 오해하기를 불교는 염세적이다, 불교적 사고방식이라면 발전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도피일 뿐이다 합니다.
불교에는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이 있듯 대원본존 지장보살도 있습니다. 4대 보살 중 두 명입니다. 지장보살은 원을 세웠습니다. 불교에서 이루려는 뜻을 세우는 것을 원이라 합니다. 소원할 때 원입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얼핏 대단해 보이지만 쉽게 납득하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지옥에 온 중생이라면 심한 죄를 지었겠습니다. 사람을 속이고, 죽이고, 고통을 준 중생들입니다. 그들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지장보살은 끊임없이 지옥으로 밀려드는 중생마저도 모두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웠습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룰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불교라 하여 마냥 안주하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원을 세우고, 이루기 위해 매일 행동합니다.
불교는 해탈을 말하고, 해탈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돈과 명예, 권력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괴롭지 않은 상태로 살기 때문에 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지장보살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면 금세 포기했을 겁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구제해도 또다시 밀려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하는지, 왜 남을 속이고, 왜 죽이고, 이해도 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한탄하며 그런 원을 세운 자신을 한없이 미워하며 괴로움에 다시 빠져들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장보살이 원을 세우고,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중생을 구제할 뿐이지,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즉 불교는 현실 안주를 위한 도피처가 아닌 괴롭지 않게 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일화를 보면 돈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속세에 있는 중생을 두고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해야만 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벌면 되는데 없다고 괴로워하거나, 벌고 싶어서 악행을 하여 괴로움을 만들어내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불교 가르침입니다. 돈과 명예, 권력을 경멸하고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 당시 수많은 왕이 부처님을 찾았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권력과 돈 모두 버리고 출가하십시오, 부질없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잘 다르시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괴롭지 않고, 백성들도 괴롭지 않을 방법을 말합니다.